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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 Out Boy - The Phoenix

[BH. BAND]

 

천재는 유전자부터 결정되는 건가? 백호는 한 학기가 다 지나기도 전에 복귀에 성공했다. 꾸준한 스트레칭과 이미지 트레이닝이 빠른 회복의 비결이란다. 토하기 직전까지 땀 흘리던 재활 훈련이나 비명도 지르지 못하던 이런저런 치료들은 별것도 아니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윈터컵 경기에서 잠깐씩 등장해서 경기의 분위기를 바꾸는 백호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여름에 산왕전에서 받은 악동이라는 별명, 미워할 수 없는 챌린저, 사그라드는 게 아쉬운 유성, 모든 걸 쏟아부었던 초신성. 그리고 그 해가 가기 전에 돌아온 혜성, 사그라지지 않은 태양, 또 다시 도전하는 챌린저, 코트의 흐름을 바꾸는 분위기 메이커.

북산고등학교 농구부는 윈터컵에서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경기장 안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 또 그 녀석인가? 이번에는 뭘 보여주려나 하는 흥분이 섞인 호기심. 저번에 많이 다친 것 같던데 괜찮은 것 맞나? 하는 걱정이 섞인 관심. 유소년 국가대표로 활동하는 서태웅, 산왕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자 주장이 된 송태섭, 2년 정도의 재활-이 아니라 방황이겠지만-을 겪고도 복귀한 정대만, 그리고 그런 관심과 시선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신나서 날뛰는 백호. 농구 천재 강백호.

이제 강백호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양호열과 조금도 관련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싫으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지만,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물으면 사실 잘 모르겠다. 축하해주고 기뻐해야 하는데 마음에 톡 튀어나온 못이 있는지 뭔가가 걸려서 속 시원하게 나오질 않는다. 모래를 잔뜩 먹은 듯 목이 까슬까슬하고 텁텁하게 꽉 막힌 마음.

 

호열은 백호를 만난 뒤로 백호가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백호도 그랬으리라. 백호가 시비가 걸려서 뒷골목으로 걸어갈 때도 호열은 그 옆에 서 있었고, 백호가 혼자 밖에 없는 집에 들어가기 무섭다며 찾아오던 곳도 호열이네 집이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쓸 편지지를 고를 때에도 호열에게 가장 먼저 물어보았다. 호열은 백호와 마주 앉아 서로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며 따갑다고 난리를 쳤고, 이불 하나를 뒤집어쓴 채 밤새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내일도 혼자 자기 글렀으니 우리 집으로 오라며 여벌 열쇠를 건넸으며, 거절당한 편지를 부여잡고 훌쩍이는 백호에게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장난을 쳤다. 구식과 대남이와 용팔이와 함께 있어도 백호의 왼편에는 호열이가 있었고 호열의 오른편에는 백호가 있는 게 당연했다.

호열은 장난처럼 백호에게 나 없으면 어쩌냐고 말하며 백호를 챙겼고, 백호는 내 옆에 네가 왜 없냐고 툴툴대며 챙김을 받았지만, 코트 위에 서 있는 백호의 옆에는 호열이 없었다. 백호는 멀쩡하게 웃으며 경기를 뛰었고, 호열은 제 옆의 빈자리를 손으로 덮으며 백호를 내려봤다. 백호는 가끔 고갤 들어 호열을 바라봤고, 호열은 계속 백호를 따라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백호를 내려다본 적이 얼마나 있더라. 싸우고 피떡이 된 백호를 일으키며 내려다봤던가, 혼자 웅크려 울던 백호를 내려다봤던가, 그러고보니 저 녀석은 한 번도 나보다 작은 적이 없었구나.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던 걸 멀리서 보고 나니 안 보이던 게 보였다.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정작 호열이었는데, 괜히 백호를 핑계로 대며 옆에 찰싹 붙어있었다.

 

백호가 미국으로 갔다. 태섭이 간 농구 장학 프로그램이랑 같은 거란다. 미국 가면 돈 많이 들지 않냐 걱정했더니 안 선생이 도와주겠다고 했단다. 미국 가면 외롭지 않겠냐 걱정했더니 이미 여우 놈도 가 있단다. 한인 컴퓨터도 있고 –커뮤니티겠지 백호야- 요새는 전화나 편지도 잘 되니까 연락도 자주 하겠단다. 나 없이 괜찮겠냐고는 차마 못 물어봤다.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내가 안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웃으며 그렇구나. 다행이네. 전화로 주소 알려줘. 편지 자주 보낼게. 하고 말았다. 와중에 나 잊지 말라는 말은 또 못했다. 미련하게 그렇게 기억되기는 또 싫었던 탓이다.

 

전날에는 호열은 백호네 집에서 집 청소를 도왔다. 옷이나 필요한 짐은 미리 보내놨단다. 가구만 덩그라니 놓인 집에 먼지를 쓸고 닦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옷장 밑에서 발견한 해동중학교 졸업앨범을 구경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배꼽시계가 울리고 나서야 깔깔 웃으며 앨범을 덮었다. 저녁으로는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미국에서도 짜장면 파나? 그 넓은 땅에 중국집 하나 없으려고. 하긴. 가면 얼마나 있지? 일단 2년. 그렇구나. 거기서 또 팀 들어가고 계약하면 더 있겠지. 그렇구나. 백호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드는 주제에 그날은 밤늦은 줄 모르고 이야길 이어갔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사이 될 줄 몰랐는데. 이런 사이? 짱 친한 친구 사이! 싫으냐? 싫을 리가! 내일 아침 비행기지? 엉. 늦었다. 이만 자자. 조금만 더 있다가 자자. 얼마나 더 말하려고? 잠 올 때까지 말하다가 자려고. 그럼 아까 잤었어야 하는 거 아냐? 몰라. 오늘은 잠이 안 오네. 떨려? ...조금. 넌 가서도 잘할 거야. 그렇지? 그럼, 천재잖냐.

백호는 미국 유학을 결정하고 나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한 번을 안 울었고 그래서 호열도 울 수가 없었다. 백호는 집 열쇠를 호열에게 맡겼고, 호열은 백호에게 더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냥 꼭 안아줬다. 백호가 더 커서 호열이 안긴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호열이 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백호가 손을 흔들며 들어가고 호열은 백호 군단 녀석들과 같이 공항에 앉아서 날아가는 비행기를 봤다. 저 비행긴가? 저거 아냐? 하고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를 하나둘 떠나보내다가 노을이 지길래 눈이 아팠다. 이제 가자길래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하길 반복하다가 해가 다 지고 하늘에 붉은 기가 하나 없이 파랗고 검어진 뒤에 일어섰다. 겨울이라서 추웠다. 백호는 몸에 열이 많아서 겨울에 옆에 붙어있으면 감기 걸릴 일이 없었는데. 훌쩍.

떠나서 없는 사람 생각해서 뭐 하냐는 듯 바로 다음 날 감기에 걸렸다. 열이 오르고 머리가 띵하고 몸이 무겁고 속이 답답했다. 토하고 싶을 지경으로 속이 진창이 되었는데 먹은 것이 없는 탓에 헛구역질만 겨우 하다가, 하다가 몇 년을 묵혀둔 감정만 쏟아냈다. 백호야. 사실은 있잖아. 내가. 너를. 예전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널 만난 뒤로. 계속. 쭉. 너를. 너만을.

계속 속에 두고 삭히기만 해서 원형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문드러진 걸 억지로 꺼내려다가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어 턱턱 걸리는 탓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다시 삼켰다. 말로는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호열은 그냥 울어버렸다. 눈물은 쏟아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렇게 울면 탈수가 와서 죽겠다 싶을 때까지 울고 나서는 감기가 다 나았다. 아주 말짱했다. 며칠간 못 나간 아르바이트처 사장님에게 죄송하다 연락을 보내고 걱정과 염려 섞인 문자들에 이제 괜찮다며 답장을 보내고 배가 고파서 짜장면이나 한 그릇 시켜 먹었다. 니글거려서 반도 다 못 먹고 버렸다.

눈 감는다고 해서 해가 안 뜨는 건 아니고, 문을 닫아둔다 해서 시간이 멈추는 건 아닌지라. 호열은 백호가 없는 학교로 갔다. 백호와 호열이 중학교 1학년 입학식 날 만난 뒤로 5년 만에 홀로 겪는 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뭐가 바뀌었냐고 물으면 다들 대학이니 진로니 이야길 꺼내기 바쁜데, 호열은 혼자 다른 생각을 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사실 아니었어요. 어쩌면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건 그 녀석이나 저나 똑같았나 봐요. 어쩌면 제가 더 그랬었나 봐요. 호열은 버릇처럼 메일을 확인했고, 우체통을 열어 봤지만, 백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래서 호열은 꽃샘추위에 머물러 있었다.

 

일단은 학교 방침이기 때문에 호열과 백호 군단 녀석들은 각자의 담임들과 진로 상담을 했다. 용팔은 아버지가 하시는 고깃집을 이어받기로 했다. 대남은 일하고 있는 미용실에 취직하기로 했다. 구식은 아는 형–너 말고 그쪽이 형 맞지?-이 스카웃 했다며 지하의 라이브 바로 간다고 했다. 호열은 그냥 모르겠다고 했다. 이제껏 해본 일은 세 녀석이 해본 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많지만 그중에서 백호가 농구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라본 일은 단 하나도 없는 탓이었다.

그래서 그냥 뭘 하면서 먹고 살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하며 먹고 살겠죠. 하고 말았다. 담임 교사는 난처하게 웃더니 그게 뭔지는 아직 못 정했니 하고 묻기에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입을 닫고 있었다. 먼지 낀 적막만 둥둥 떠다니는 게 영 못마땅했는지 담임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호열이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 봤다던데, 무슨 일을 해 봤니?

... 이것저것요.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 이유는 뭐야?

... 돈 때문에요.

돈이 필요한 일이 많았니?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죠.

음, 일 중에 가장 오래 해본 건 뭐니?

... 글쎄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 기억력이 안 좋아서요.

좋아하는 건 있니?

...네.

 

빨간색을 좋아해요. 하염없이 멈춰 서서 바라보기만 해도 좋을 정도로 좋아해요. 아니다, 좋아했어요. 노을도 장미도 성냥의 머리 부분도 신호등의 멈춤 신호나 쌈박질을 하다가 흘린 피마저도. 하다못해 내가 없는 농구코트의 붉은 마루 바닥도 한 손에 들어오지 않는 동그란 농구공도. 근데 그것들이 지금은 다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뒤이어 올 말을 기대하는 담임을 앞에 두고 호열은 고개를 돌렸다. 다음 상담이 있는 탓에 시간을 오래 쓸 수가 없어 호열은 첫 진로 상담을 그렇게 하고 말았다. 다음 달에는 진로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해보라는 담임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나왔다. 습관처럼 고갤 올려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도 그때 너 따라 농구나 할 걸 그랬나. 나나 태섭군이나 키도 비슷하니 나쁘지 않았을지도 몰라. 노을이 다 사그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이 시큰거렸다.

만우절이 닥치고 나서야 호열은 봄을 인정했다. 백호가 없더라도 백호의 생일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수업 시간에 장난으로 보내는 쪽지 말고 백호에게 이런 편지글을 보낼 일이 없었다. 어색하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 겨우 담아서 메일을 보냈다. 답장이 없으면 어쩌지. 백호가 러브레터 쓸 때 옆에서 어떻게 쓰는지 좀 봤으면 좋았으려나. 역시 그때 쪽팔리더라도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해볼 걸 그랬나 걱정하며 잠들었다.

그러다 새벽 중에 깼다. 전화벨 소리가 시끄러워서 도무지 잠이 안 왔다. 쌍욕을 퍼부을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여보세요?

호열아!!

 

익숙한 목소리에 잠이 덜 깬 건지 다 깬 건지 헷갈렸다. 이렇게 바로 연락이 온다고? 그냥 백호 생각하다가 꿈 꾸는 건가? 어리바리하게 아무말도 못 하고 있으니 수화기 너머로 다급하게 말이 쏟아져 나왔다.

 

호열아? 호열아! 나 백혼데, 아씨 또 번호 틀렸나? 헤이, 익스큐즈미 쏘리!

아니, 아니 백호야. 나 맞아.

양호열!!

응, 나 여깄어. 백호야.

흐어어엉, 호여라!!

 

아, 현실 강백호다. 잠이 다 깼다. 새벽 2시였다.

 

백호는 점심시간이란다. 연습 경기 보러 온 태섭의 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단다. 미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기숙사에 있는 전화로 매일 호열이랑 백호 군단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아무도 받질 않았단다. 그래서 시차 때문인가 학교에 있나 생각했는데 오늘 이유를 알았단다. 국제전화는 번호가 다르단다. 오늘 태섭에게 배워서 이제 매일 전화할 수 있다며 웃었다.

이메일을 보낼 생각도 했는데 학교 컴퓨터에 한글 타자가 없어서 적을 수가 없었단다. 하긴 백호는 아이디도 비밀번호도 자기 이름을 영타로 적은 걸로 정한 탓에 한글 없이 영어 자판만 있었다면 못 적겠다 싶었다. 그래서 호열은 새벽 중에 백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파벳으로 읊어줬다. rkdqorgh0401 shdrncjswo10 강백호0401. 농구천재10. 자기랑 머리를 맞대고 실실대며 정한 아이디랑 비밀번호. 분명 외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영어 타자는 기억을 못했구나 싶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연락을 먼저 보낼 수가 없어서 어쩌지 걱정되고 엄청 쪼금 진짜 아주 조금은 힘들고 외롭고 그랬는데 아까 태섭의 얼굴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뺏어서 바로 나한테 전화를 했단다. 이상한 번호로 전화를 한 탓에 한 번 혼나고 나서 국제전화하는 법을 배웠다고. 하하하. 호열은 새벽에 술을 마신 것처럼 기분이 들뜨고 즐거웠다.

미국은 뭐든 다 커서 좋은 것도 있고 어색한 것도 있어. 너가 미국 오면 거인 나라에 있는 꼬맹이 같겠더라. 햄버거를 자주 먹었는데 감자튀김이 엄청 짠데 거기다가 케첩까지 찍어 먹더라. 영어 쓰는 거 아직 좀 어색하긴 해. 그래도 천재니까 의사소통은 다 할 수 있어. 오랜만에 한국말 왕창 하니까 좋다. 기숙사에서 지내는데 3명이 같은 방이야. 너나 애들끼리 같이 잔 적이 많으니까 기숙사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완전 꽝이었어. 맨날 노래를 틀어놓는 애가 있는데 처음에는 좀 시끄러웠는데 듣다 보니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해. 포라루보이 밴드 음악이래. 우리 농구부 응원가로도 쓰인다고 해서 많이 듣고 있어. 농구부 유니폼이 빨간 색이라 북산 생각도 많이 나더라. 빨간 새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옛날에 닭대가리라고 시비 걸리던 게 생각나서 그렇게 맘에 들지는 않아.

한 시간 정도 통화를 했다. 백호는 두서없이 겨울 동안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바빴고 호열은 진짜? 정말? 같은 말만 겨우 내뱉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백호의 목소리가 그리웠기 때문에 괜히 중간에 이야길 끊고 제 이야길 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호열은 전화가 끊겼나 싶어 조급해진 마음으로 백호의 이름을 연달아 불렀다.

 

백호야? 강백호? 끊긴 건가? 백호. 들려? 강백호!

...흐,

...너 울어?

...아니, 그냥.

...

...그냥 네가 내 이름 불러주니까 좋아서. 내일 또 전화해도 돼?

...당연하지. 뭘 그런 걸 묻고 그러냐?

태섭이가 폰 찾는다. 그럼, 내일 또 전화할게.

응, 기다리고 있을게.

내일 보자 호열아

그래, 내일 봐 백호야.

 

뚜-뚜- 소리가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호열은 흥얼거리며 웃었다. 한 달 만에 듣는 익숙한 인사말. 백호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녀석도 안 괜찮았던 것 같아서 기뻤다. 나만 안 괜찮은 게 아니라서 좋았다. 호열만 백호가 없다고 눈물 흘린 게 아니라서 외롭지 않았다. 창밖에는 벚꽃이 만개해있었고 봄바람이 산뜻하게 꽃잎을 간질이고 있었다. 벚꽃이 춤을 추며 바닥을 스쳤다가 하늘을 날았다가 하는 걸 보며 호열은 오랜만에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호열은 근본이 양아치인 놈인데다가 한 번도 공부 쪽으로 진로를 정한 적이 없었다.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대다수의 선생들은 그러려니 하고 호열을 못 본 척했다는 뜻이다. 백호에게서 메일의 답장이 와 있었다. 한 시간 내내 한 통화에 미처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 담은 탓에 스크롤을 내리고 내려도 끝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한 글자 한 글자 아껴 읽고 싶어서 천천히 내린 탓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 겨우 적은 메일에 답장이 얼마나 긴지.

호열의 생일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구구절절 가득 차 있기도 했고 생일 축하해줘서 너무 기쁘다는 얘기도 있었다. 팀메이트에게 생일이라고 하니 만우절 장난치고 뻔하지 않냐길래 여권까지 보여주고 나서야 생일 파티를 했고 케이크는 종류별로 먹었는데 내가 해준 미역국을 못 먹어서 허전하단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백호가 바로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는 얼굴과 툴툴대며 늘리는 말투가 선명했다. 답장을 꼭꼭 해달라는 말로 메일이 끝나버렸다. 호열은 아쉬운 마음이 들다가도 어떻게 답장을 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었다.

편지를 적어본 경험은 딱히 없다. 그래서 먼저 보낸 메일에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밖에 못 적지 않았던가. 글은 어떻게 써야 하나. 수업 시간 내내 공책에 수업 내용이 아닌 답장에 대한 고민을 빼곡하게 채웠다. 친구는 닮는 법이라서 호열도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백호의 지나가는 한마디마다 답변을 남기듯 답장을 남겼다. 말하는 것보다 더 쉽게 적히는 글들도 있었다. 밤 중에 백호와 전화하면서는 도무지 꺼낼 수 없는 말들은 보내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변명 아래 술술 적혔다. 메일을 지웠다가 다시 적었다가 반복하다가 원래 쓰려던 말들의 반의 반만 남겨서 보냈다.

 

백호의 일상을 공유받자 호열은 숨통이 트이고 손끝에 온기가 돌았다. 호열은 학교에서 백호에게 보낼 답장을 궁리하고 집에서는 백호의 전화를 기다리며 살았다.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나갔고 호열의 일상 이야기를 백호에게 해주면 백호도 즐거워했다.

 

최근에 새로 들어온 알바는 기타리스트였대. 멋지지? 나도 조금 가르쳐달라고 할까 봐. 밴드는 멋있잖아. 하하, 백호군단끼리 밴드를 했어도 좋았겠다. 그래도 넌 농구천재니까 농구를 했겠지? 뭐든 잘하니까 밴드도 잘했을 거라고? 아무렴 그렇고말고. 아, 점심시간 끝났어? 아쉽다. 으응, 아냐. 그래. 오후에도 열심히 해. 곧 경기 나간다며? 그래. 바쁘면 전화는 가끔만 하자. 메일도 하는데 뭐. 굳이 둘 다 하면 시간 낭비지. 난 괜찮아. 응, 그래. 시간 날 때 연락 주라.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라. 호열은 점점 욕심이 났다. 애초에 백호는 항상 호열의 옆에 있었는데, 농구가 그 자리를 빼앗은 거 아닌가? 문득, 중학교 졸업앨범이 보고 싶어졌다. 졸업사진을 찍는 날에도 얼굴에 덕지덕지 흉터와 밴드를 붙여놓은 주제에 머리는 왁스로 올려 멋을 낸 백호와 호열의 사진. 호열이 꼬리빗으로 머리를 다듬고 있자 덥수룩해서 사자갈기 같은 머리를 한 백호가 옆에서 눈치를 보며 자기도 해달라고 조르던 그 날의 기억. 세상에 둘뿐이어도 즐겁고 행복했던, 아니 오히려 둘만 있어서 충만했던 시기.

주먹도 제대로 쥘 줄 모르던 백호를 저와 같은 양아치로 만든 것도 호열이지만, 사실 사랑에 눈멀어 농구를 시작한 백호에게 확신을 준 것도 호열이었다. 백호의 모든 변화에는 호열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변화의 끝은 호열이 어찌할 수 없는 결과들이었다. 주먹질에 요령이 생긴 백호는 호열 말고도 새로운 친구들을 데려와 군단을 만들어 외롭지 않다며 웃었고, 농구로 인해 다쳤음에도 다시 농구를 하고 싶다며 눈을 빛내며 끔찍한 재활 끝에 미국으로 떠났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눈이 따가웠다. 바랜 사진 위로 백호의 빨간 머리가 흐릿하게 보였다. 백호가 농구를 안 했다면 지금 옆에 있었겠지. 백호의 부상이 낫지 않았다면 내가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겠지. 이딴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징그러워서 호열은 웃었다. 아니 울었나? 잘 모르겠다. 백호가 떠난 뒤로 부쩍 눈물이 늘었다. 원래 눈물이 많은 건 호열이 아니라 백호였는데. 백호가 사라지자 호열이 빈자리를 채우고 백호가 흘려야 했던 만큼 우는 건지도 몰랐다.

백호는 위로를 받으면 울고 싶어진다고 했지만, 호열은 백호가 없으니 울고 싶어졌다. 백호가 없으니 말려줄 사람도 없는 탓에 백호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 새벽에는 늘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공책에 메일에 담지 못할 말들을 한가득 적어 내리기도 했다. 적막이 싫어서 틀어둔 라디오에서는 하필 구구절절한 사연과 지독한 사랑 노래가 나오길래 주파수를 돌렸다. 귀가 찢어지도록 시끄러운 락밴드 노래가 나왔다. 차라리 이게 낫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런 구질구질한 모습을 백호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지. 그리고 백호는 농구만 들고 미국에 간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추악하고 못난 감정들은 빛날 일만 남은 백호보다는 호열에게 더 어울렸다. 강백호는 커다란 기회의 땅에서 빛나기만 하면 충분하지. 사랑받기만 해도 부족할 녀석이니까. 여름 장마가 길었다. 호열은 방구석에 핀 곰팡이를 무시해버렸다.

 

미국에 적응하고 연습과 훈련에 지친 백호에게서는 소식이 점점 줄었다. 가을에는 거기서도 주전이 되었고 더 많은 경기를 나가게 되었단다. 그래서 더 바빠질 거라고, 전화 연락은 조금 줄어들 것 같다고 말하는 백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담겨 있어서 호열은 싫다는 티도 못 내고 웃어버렸다. 백호는 이제 돌아오지 않으려는 거구나. 미국이 더 편해진 거구나. 알았어. 언제나 응원하고 있을게. 힘내라 천재.

결국 겨울이 되고 백호 없이 졸업식을 지냈다. 친구들은 동네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었고 호열도 다니던 알바의 시간을 늘렸다. 그러고 나서는 호열도 이제 백호가 없는 상황에 익숙해졌고, 백호가 없는 자리에 채워 넣을 만한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온갖 종류의 취미를 기웃거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기도 했다. 대남이가 같이 밴드 해볼래? 하는 말에 덜컥 그럴까?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호열은 아는 게 얼마 없었지만, 그건 대남이도 마찬가지였다. 두 명으로 밴드가 되려나? 네 명 정도는 있어야겠지? 노구식 부를까? 용팔이도 부르자.

언젠가 백호와 전화를 하면서 밴드를 했어도 좋았을 걸 하고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어 그런지 녀석들의 이름이 먼저 생각났다. 나중에 보니 오히려 구식과 용팔이 밴드에 대해 아는 게 더 많았다. 구식은 라이브 바에서 일하면서 밴드를 볼 일이 많았고, 용팔이는 드럼에 취미가 생겨서 배우고 있었단다.

이왕 만든 거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익숙한 낯들이라 익숙한 이름이 먼저 튀어나왔다.

 

백호 군단으로 하자.

강백호가 없는 백호 군단?

그 백호가 아니라 하얀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면 되잖아.

그것도 그런가?

호랑이 멋있지. 난 좋아.

결국 돌고 돌아 백호 군단 완성이네

 

구식이가 만들어주는 술을 마시며 킥킥대다가 문득 생각나서 말했다. 백호와 밤늦게 통화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예언가냐며 놀라는 대남이와 그러면 로또 번호도 맞춰보자고 숫자를 불러달라 장난치는 용팔이 사이에서 구식이는 계속 칵테일을 만들어줬고 호열은 주는 대로 마시다가 한껏 취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한밤중에도 세상이 알록달록했다. 백호에게 백호군단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 텐데! 그러고보니 메일을 안 본 지 꽤 되었던가? 흔들리는 손으로 아이디를 입력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백호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호열은 술김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적어 보냈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들었는데, 기시감이 드는 벨 소리에 잠이 깼다.

 

여보세요?

호열아

어어...

자고 있었냐?

으응, 그렇지 뭐.

거긴 몇 시냐.

새벽 6시...

이런, 여긴 저녁 5시라서... 저녁 먹고 나서 자기 전에 연락했어.

흐아암, 그렇구나.

응. 아까 메일 봤어. 재밌겠던데?

메일? 아... 뭐라고 적어놨더라...

애들이랑 밴드 하기로 했다며. 백호군단이라는 이름으로 한다길래 바로 전화했지.

하하, 맞아. 그랬지. 너 대신이야.

나 대신?

응, 너는 이제 미국에 있으니까. 우리끼리 너 생각하면서 만든 거지.

 

그건 좀 싫을지도

뭐가? 싫으면 하지 말까? 이름 바꾸는 건 금방 하는데.

음... 아냐 좀 멋없어. 말 안 할래.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그게 할 말이야? 빨리 말 안 해?

그냥, 나 대신이면 이제 나는 필요 없나 싶어서...

 

강백호는 잠이든 술이든 한 번에 깨우는 재주가 있다. 아니다, 사람이 지금 현실에 있는지 꿈결에 있는 건지 모르게 만드는 재주다.

 

어?

미안, 말이 이상하게 나왔네.

아니, 미안할 필요는 없지. 왜, 왜 그런 말을 해?

...있잖아 호열아

응 듣고 있어.

...보고 싶다.

...

경기장에서 문득 고개를 드는데 자꾸 어색한 거야. 처음에는 미국이니까 경기장이 커서 그러나, 한글은 보이지도 않고 영어만 잔뜩 있어서 그러나 했거든? 근데 있잖아, 호열아. 내가 자꾸 같은 곳을 보고 있대. 나는 몰랐그등.

... 어딜 보고 있었는데?

2층 응원석 맨 앞줄을 그렇게 보고 있대. 징크스라고 있냐고 물어보더라. 징크스가 뭔지도 몰랐는데, 나보고 그런 게 있냐길래 없다고 했지. 근데 있었나 봐. 나 있지. 호열이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술을 마셔서 그런가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튀어 나갔다.

 

보러갈까?

미국까지?

역시 힘드려나?

올 때 엄청 힘들던데... 비행기도 몇 번 바꿔타야 하고 시간도 엄청 걸리고 그리고 또 이것저것 물어보는 건 많은데 다 외국말이라서 알아듣기도 힘든 거 있지. 그니까, 그러니까. 근데, 그치만 있잖아 호열아.

...

나 보러오면 안 되냐...

갈게. 그니까 기다려.

진짜..?

응. 내가 언제 백호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냐.

아니.

그치?

응.

늦게 갈지도 모르지만, 꼭 갈게. 백호야. 내가 네 옆으로 갈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통화를 했다. 호열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전화기를 잡고 있었고 백호는 달이 중천에 오를 때까지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호열은 백호에게 이기는 방법을 모르겠다. 실은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백호가 붙잡고 있는 고민과 고통을 나눠 갖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백호에겐 그런 것들이 안 어울렸다. 양호열은 취해서 그런 건지 잠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이유를 도통 알 수는 없었지만, 강백호가 보고 싶었다. 사실은 언제나 그랬다. 심장이 뛰는 박자로 달려가면 오늘이 가기도 전에 백호의 앞에 서 있을 수 있을 텐데.

 

사랑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양호열은 그저 강백호의 곁이면 충분했다. 자그마한 상처에도 붙일 수 있는 밴드라면 더할 나위 없다. 다만 그 아이 옆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웅크려 앉아있는 녀석에게 손 내밀어 일으켜 줄 수 있다면,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는 녀석을 위해서 목이 터져라 응원할 수 있다면,

백호가 고난을 극복하고 삶을 바꾸는 아주 자그마한 스위치가 호열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호열은 강백호가 없는 봄을 두 번 겪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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