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과 함께 밴드를 병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의 회사원은 일에 지쳐 집에 와서는 쓰러져버릴 테니까. 그게 아니라도 집안일과 여러 가지로 없어지는 시간을 짜내서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호열이 어떻게든 밴드를 같이 해내고 있는 건 첫째로 어릴 적 쌈박질로 길러진 그의 체력이 남들보다 튼튼하고, 둘째로 현재 그가 하는 일이 사무직임에 따라 드문 야근을 제외하면 일정한 퇴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밴드에서 보컬로 노래를 부르는 활동 자체가 그에게 있어 일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힘이자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이라서다.
물론 처음부터 호열이 노래에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등학생까지만 해도 호열에게 노래의 대부분은 백호의 동요였다. 하루의 대부분을 백호의 곁에 있는 그가 가장 많이 듣는 노래이기도 하고, 그 외에 아르바이트에서 듣거나 길가면서 듣는 노래는 소음에 불과했다. 사실 감정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백호이기에 온갖 감정이 들어있는 그 동요가 호열은 좋아한다. 그래서였을 테다. 백호가 유학으로 그의 곁을 떠났을 때 남은 빈 곳을 참을 수 없어 다른 소리로 채우게 된 것에는. 마치 해가 진 하늘에 새까만 칠을 해버리는 것처럼, 호열은 비디오 레코드들을 마구잡이로 주워 담았다.
비디오 레코드가 카세트테이프로 넘어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막을 참을 수 없는 것은 집이나 밖이나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밖에서 호열의 허전함은 극에 달했다.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백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스쿠터를 타면 뒤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호열은 현실적인 인간이기에 이게 자신의 짝사랑이 만들어내는 환청임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해결될 리 없다. 그래서 억지로 귓가에 노래를 넣다 보면, 호열은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라 자신의 기호에 맞는 음악들로 카세트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중 대부분은 잔잔히 이야기하듯 흐르나 지루하지는 않은 감성 밴드 계열이었다.
여기서 재밌는 부분은 백호 군단의 백호 외 나머지 밴드를 처음 만든 건 대남이라는 것이다. 호열의 카세트테이프를 빌려 가던 녀석이 어느 날 기타가 여자들에게 인기 많다며 온종일 기타를 붙잡고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운 좋게도 작은 무대에 한 번 서보고, 용팔이 공연을 봤다가 자신과 어울린다며 드럼을 붙잡고, 구식이 외모에 어울린다며 대남의 기타 선생에게 베이스로 캐스팅 당했다. 그러니 호열이 그 밴드의 보컬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백호라면 분명히 호열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할 테니까.
호열은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너무 노골적으로 백호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즐거운 노래는 행복을 말하고 아련한 노래는 그리움을 말한다는데, 호열의 행복은 백호의 곁에 있는 것이고 호열의 그리움은 백호를 떠올리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려고 감정을 잡을 때 마다 가장 이입하기 쉬운 상황이 백호를 빗대 떠올리는 상상이니 어쩔 수 없이 호열의 노래에는 백호가 담길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호열은 바로 알았다. 백호는 감이 좋은 아이니까 이건 듣자마자 눈치채겠다는 것을.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세 녀석의 입도 막아두었다. 대남이가 기타를 한다는 사실은 숨길 필요 없지만 굳이 호열이 보컬을 한다는 사실을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숨겨서일까, 호열은 노래를 부르는 일에 점점 매료되었다. 여전히 꿈에서조차 말할 수 없는 마음이나, 음악으로 하는 표현은 그의 숨을 트여주는 부분이 있었다. 같이 연주하는 세 녀석은 이미 호열이 백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외의 관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좋은 노래에 열광했다. 마치 자신의 사랑이 괜찮다고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노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보면 적어도 이게 나쁜 건 아니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어두운 무대 위에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마이크를 잡고 있으면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백호가 이런 기분이었을지 어렴풋이 짐작해 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백호 군단 밴드, 대중에게는 호랑 밴드라 불리는 이 밴드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시간은 저녁밖에 안 되고 부르는 노래는 격렬하지 않아 처음에는 작은 바 에서나 행사에서 간단히 시간을 채우는 밴드에 그쳤지만, 알음알음 소문을 얻다 보니 팬이 생기고 더 큰 곳에 자리가 나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가명을 쓰는 것은 멋없는 일이라 셋은 본명으로 활동하고 호열은 아예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보컬 이름이 뭐냐는 물음도 많았지만 그걸 알 필요가 있냐는 호열의 단호한 얼굴 앞에서 호랑 밴드의 보컬은 '무명'이 되었다. 물론 말을 지어내기 좋은 팬들답게 팬덤에서는 밴드 이름을 따서 호열을 호랑이나 검은 호랑이, 흑호 같은 말로 불렀으니 백호 군단의 나머지 셋이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쯤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이 등장하고 동영상을 촬영해 온라인에 올리는 열풍이 뜨기 시작했다. 이런 유행에 빠질 수 없는 대남이 우리도 올리자면서 온갖 공연과 연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호열은 조금 떨떠름했지만, 말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놔두었다. 사실 자신을 숨기는데 안일해져 있는 부분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백호는 미국에서 활약하며 바빠 보이는데 이런 영상을 보기나 할까 싶었다. 그 큰 손으로 타자를 치려고 키보드를 어설프게 만지작거릴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기계를 다루는 쪽으로 백호는 약하니까.
영상은 순조롭게 온라인에 올라갔고 여러 사람의 눈에 들었다. 실력을 알아본 사람들에 의해 공연할 수 있는 곳은 늘어났고 그러다가 엄청난 게 잡힌 것이다. 유명한 축제, 메인과 가까운 시간에서 공연할 기회. 놓칠 수 없었다. 그 어릴 적 백호가 전국대회에 진출했을 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언젠가 저 메인에 도달할 생각을 하면 그답지 않게 희열이 돋았다. 공연할 수 있는 음악은 네 곡이었으니 대중적인 오프닝 곡, 분위기를 띄우는 곡, 신나게 놀 수 있는 곡, 마무리 잔잔한 곡으로 하나씩 선정했다. 그중에서 마무리 잔잔한 곡으로 고른 게 바로 LUCY의 '해가 뜨는 밤'이었다.
이 곡을 고른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백호가 떠올랐기 때문에. 호열이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항상 백호와 가까운 노래였다. 그래야만 목소리에 감정이 담기고 노래가 마음을 울렸다. 백호의 경기를 TV로 본 다음날이나 백호의 뉴스를 본 날, 백호가 해온 연락을 받은 날이면 공연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마치 이 노래의 가사처럼, 호열에게 백호는 수많은 별과 우주가 택한 유일한 존재다. 그에게 따뜻한 온기와 빛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공연에서 부를 다른 노래도 마찬가지이지만 호열에게 이 노래는 백호와 자신을 선명히 빗댄 노래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무리이고, 그래서 더 잘 부르고 싶었다.
그날부터 호열에게는 하나의 루틴이 생겼다.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백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직장인의 퇴근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대부분 그 시간은 오후 6시에서 7시 사이가 된다. 그러면 미국 시카고에 있는 백호의 시간은 오전 4시에서 5시로 침대에서 일어나거나 아침 조깅을 나설 때이다. 호열의 메시지가 오는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든 백호는 하고 있던 일을 마치자마자, 또는 그 중간에 호열에게 전화를 건다. 호열은 지하철 안에서 백호의 전화를 받고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백호의 시간으로 아침 해가 뜨는 6시가 되면 전화를 끊는다. 백호에게 처음 전화를 부탁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하는 자신이 멋쩍었으나 효과는 좋았다. 아니, 마음이 좋았던 걸까. 단지 연인도 매일 전화는 하지 않는다던데 친구인 두 사람이 이렇게 된 상황이 웃기기는 했다.
물론 백호가 비시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즌의 백호는 무엇이 그리 치열한지 미국 시각으로 점심이나 늦은 저녁, 이곳 시각으로 새벽이나 점심이 되어서야 연락을 보냈다. 그러면 호열은 거의 받지 못하거나 한참 지난 답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가 새벽에 호열이 전화를 받으면 백호는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빠르게 하고 정해진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전화를 마무리했다. 경기가 있는 날들은 그런 연락도 어려워서 아주 가끔 있는 일이기도 했다.
호열은 먼저 연락을 걸지 않았기에 모든 연락은 백호가 시간이 있을 때로 좌우되었다. 그 말은 반대로 백호가 시간이 없을 때면 호열은 백호의 드문 연락을 붙잡고 하루를 살아가야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번 연락의 백호는 어떤 목소리였는지, 지금도 그럴지, 자신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없을지. 많은 말을 마음에 담아둔 채 다음 연락이 오면 여전히 백호의 말을 들으며 필요하면 조금만 꺼내서 건네주는, 그런 순간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가사에 있던 말이 더 와닿았던 것일까.
현재로 돌아와서 백호와 전화가 끝난 뒤 호열의 시간으로 저녁 8시 집에서 밥을 차려 먹고 9시가 되면 밴드 연습실로 다시 출근한다. 공연을 앞두고 매일 연습실에 가니 투잡을 뛰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호열은 어릴 적부터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니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오히려 백호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 다른 녀석들이 있는 연습실로 들어가면, 백호와 전화할 때부터 그때까지 모든 순간이 마치 어릴 적으로 돌아온 기분이 든다. 나이도 달라졌고 하는 일도 달라졌지만, 그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이야기하고 서로 놀리며 웃음 짓는 시간을 보내면 정말 과거로 시간 여행한 것만 같다.
그래도 호열을 포함해서 백호 군단이 할 때는 제대로 해내는 녀석들이기에 연습은 해가 지고 자정이 지날 때까지 이루어졌다. 모두가 지칠 때쯤 연습실을 나가 흩어진 뒤, 하늘을 바라보면 어둠이 깜깜하게 내려앉아 달이 홀로 빛났다. 저 달빛은 햇빛을 받아 빛나지만 해와 같이 있지는 않구나. 호열은 종종 자신이 달과 같다고 생각했다. 백호의 빛을 받아 빛나는 자신, 하지만 백호와 같이 있지는 않는 자신. 생각이 무대로 돌아오면 호열은 잠시 갈등 한다. 이번 무대는 백호에게 말하는 게 맞지 않을까. 말하면 자신이 그 뒷감당을 책임질 수 있을까. 순수하게 축하를 받는다면 자신은 버틸 수 있을까. 이성적으로는 계속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끝에 가서 결국, 호열은 말하지 못했다. 회사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차를 내두고 백호에게는 내일 시간이 안 된다는 말로 이제 괜찮다고 해두었지만, 공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올릴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말하면 백호는 미국에서 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 것이다. 그건 안 될 일이니까.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당일이 되어서 시작 전 리허설을 하고 본 무대를 기다리며 화면으로 앞선 무대를 바라볼 때까지 호열은 백호에게 어떤 연락도 전할 수 없었다. 단지 이번에도 노래에 모든 것이 담기겠구나. 그 정도의 체념과 무대 자체에 대한 기대만이 감정을 이뤘다. 이 공연은 호열이 꿈꾸던 곳이니, 밴드가 할 일은 곡을 연주하는 것이고 보컬인 호열이 할 일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시간이 되어 계단을 올라 무대에 발을 올렸을 때 함성이 들렸다.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남들보다 하나 더 큰 키, 새빨간 머리카락. 강백호가 왜 여기 있어. 호열이 다른 녀석들을 둘러보자 씨익 웃어 보인다. 나중에 두고 보자, 같은 생각을 했지만 반주가 흐르고 기타 소리, 드럼 소리, 베이스 소리가 울려 퍼지자, 본능적으로 노래가 튀어나왔다. 그러니 시선은 어쩔 수 없이 백호에게 향하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백호를 반겼다. 자신이 부르는 모든 노래는 너를 위한 것이기에. 마주하는 시선이 서로를 붙잡는다. 백호의 시선 또한 호열에게 고정되어 있다.
어라, 이게 맞아?
호열의 머리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대남이가 찍던 밴드 동영상, 백호가 매일 자신에게 연락을 걸어주었던 행동, 내일 시간이 안 된다고 했을 때 의문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던 반응, 경기에서 리바운드를 하듯 무대 아래에서도 어떻게든 그를 붙잡겠다는 강렬한 눈빛.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말없이 받아 주었던 거구나. 같은 마음이구나. 마지막 노래의 마지막 가사를 부르는 순간 호열은 자신이 직감적으로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달빛이 펼쳐진 여기, 내 그림자가 널 가리우는 이 순간, 붉은 노을인 네 끝자락을 꼭 붙잡을 테다. 네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너의 온기를 품고서 담아둔 채 살아있으니까. 지금, 해가 뜨는 밤, 나는 너와 같은 하늘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