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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의 하루

호열은 책상에 올려진 종이 서류들, 그리고 커서가 깜짝이는 컴퓨터 빈 화면을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한숨 소리에, 사방에서 연달아 한숨 소리가 이어진다. 아마 다 같은 생각하는 것이겠지.

아, 재미없다.

이렇게 재미없는 어른이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학생 때 마음껏 놀 것을. 학생 때는 무엇을 해도 다 재미있었는데. 친구들과 땡땡이를 치고 놀러 나가도, 걸려서 선생님에게 혼이 났을 때도. 옥상에 올라가 빵과 우유로 대충 점심을 때워도 그때는 괜찮았다. 똑같이 회사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빵하고 우유를 때울 때? 조금 서러웠지.

아, 빌어먹을 회사.

입사 했을 때, 딱 3년만 버텨서 경력 쌓고 이직해야지 했는데 어느새 팀장이 되어버렸다. 아래에서는 부하 직원들에게 밀쳐지고 위에서는 선임들에게 눌린다는 팀장. 호열의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팀장이 되었느냐? 여기엔 어른들의 사정이 있다. 신입 때 함께 들어왔던 입사 동기들은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며 진작에 그만둬 버렸고, 자기 위에 있던 선임들도 제 살길 찾아 떠나버렸다. 자신도 떠나자니 달마다 들어오는 쥐꼬리만 한 월급이 아쉽고, 또 막상 여길 떠나서 하고 싶은 것을 찾는다고 하기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이제는 젊다고 말 못 할 제 나이가 걸린다. 어찌 되었든 아득바득 남아 있다 보니 사원, 대리, 팀장으로 사람이 없어 빠르게 승진 아닌 승진한 것이다. 어른의 세계는 생각보다 돌아가는 것이 엉성하기 짝이 없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던 호열은 팀원들에게 다들 잠깐 쉬시죠, 말하며 사무실을 나왔다. 화면을 노려본다고 제안서가 절로 써지진 않으니. 품 안에 담뱃갑을 꺼내고 옥상 계단으로 올라가며, 목을 조르는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고 문을 열면, 하늘과 제법 가까운 풍경이 펼쳐진다.

휘유-. 날씨는 끝내주네. 옥상에서 태우는 담배는 한숨과 함께 구름 같은 연기로 흩어진다.

옥상.

학생 때 옥상에서 자주 농땡이를 피우곤 했는데. 호열은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멍하니 하늘은 본다.

인생 재미없구먼.

중, 고등학생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겨운 잔소리들에서 벗어나 어른이 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절대로 저런 재미없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죽은 생선 눈깔로, 늘 화가 나 있고 무기력한 그런 어른은 안 될 거야. 친구들만 있다면 즐거운 나날이 계속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백호가 미국으로 떠나고 벌써 10년이 흘렀다. 함께 주먹질하며 싸우던 친구는 누구보다 반짝이는 별이 되어 티브이 브라운관에, 아주 가끔 스포츠 신문란에 나온다. 그럴 때마다 백호가 없는 백호 군단들은 용팔의 작은 가게에 모여 자리에 없는 백호를 추억한다. 사람이 나이 들면 옛이야기들만 꺼낸다더니, 지금 꼴이 딱 그 꼴이다.

몇 년 전, 그날도 그랬었다.

한국인 NBA 농구선수 강백호! 영광의 우승 트로피를 쥐다! 스포츠란 대문짝만하게 림에 공을 내리꽂는 백호의 사진을 보면서 술잔을 나누다가 꽤 술에 취한 대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야, 사는 게 왜 이리 재미가 없냐.”

대남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저마다 푸념을 쏟아낸다. 맞아, 어른 재미 없어. 맨날 똑같은 일만 반복이잖아. 하지만 너무 변화하면 이젠 무섭다고. 그건 그래.

이 무료함을 풀 곳이 없을까, 고민하다 다시 대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 맞다.

“너네 악기 배워볼 생각 없냐?”

“갑자기?”

“엉, 일하다가 친해진 사람이 음악학원을 하는데 오면 싸게 해주겠다고 해서.”

“악기 배우면 좋지.”

“좋긴 한데 시간이 나려나 모르겠네.”

“거기 어차피 학원은 상시 개방이라 상관없어. 가서 악기만 연주해도 되고, 선생님 만날 때는 시간 맞춰서 가야 하긴 하지만.”

“오 그건 좋다.”

술김에 나온 음악 이야기는 어느새 나아가 밴드를 만들자! 가 되어버렸다. 악기라곤 다룰 줄 모르는 네 사람은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듯, 취해서 발갛게 물든 얼굴로 웃었다. 야야! 밴드 하려면 뭔 악기를 배워야 하지? 잠깐의 정적이 흐르다 구식이 돌연 손을 들며 외친다.

“밴드는 베이스가 꽃이다, 이놈들아. 나 베이스!”

구식의 말에 대남은 헹! 콧방귀를 뀌며 손을 든다.

“야! 기타가 꽃이지! 내가 기타 할래!”

용팔은 뱃살이 흔들리게 웃다가 안경을 고쳐 쓰며 손을 든다.

“무슨 소리야 드럼이 꽃이다! 나 드럼!”

여기는 꽃밭인가 다 꽃이라고 하네. 멍하니 있던 호열은 손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아, 보컬이 꽃이라고.”

그렇게 술향기 풍기며 만들어진 밴드 이름은 당연하게도 백호 군단이다.

악기를 배운다고 금방 전문가처럼 연주하지는 못하니 한동안은 서로 모여서 자기 악기를 배우느라 시간을 보냈고, 좀 익숙해졌다 싶었을 때 백호 군단의 영광스러운 첫 연주곡은 ‘떴다 떴다 비행기’였다. 완주 후에 다들 환호성을 지르며 완벽했다고 박수 칠 때, 호열은 느꼈다.

즐겁다. 재미있다.

남들은 늦은 나이에 무슨 악기를 배우겠냐고 말하겠지만, 뭐 어떤가. 재미있잖아?

누구 하나는 금방 그만둔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이 백호 군단 밴드는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몇 번의 공연도 해보았다. 다음 주에도 나가기로 한 공연이 있는데, 직장인 아마추어 밴드들이 모인 공연이다. 덕분에 요즘 퇴근 후 백호 군단은 음악학원으로 모이고 있다.

호열은 손목에 감긴 시계를 보고 남은 담배를 태웠다. 농땡이는 여기까지. 8시 전에 퇴근하려면 이제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담배 냄새 풍기며 사무실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기에, 호열은 항상 담배를 다 태운 후 화장실로 직행했다. 꼼꼼히 양치질하고, 비누로 세 번 손을 씻고, 휴대용 탈취제를 온몸에 뿌린다. 그리고 무향 핸드 로션을 발라주면 담배 냄새는 아주 없어졌다 할 순 없지만 그래도 꽤 많이 제거가 되어서. 그제야 호열은 사무실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강백호의 전화는 항상 새벽에 온다.

게다가 매일 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틈이 났을 때 백호가 전화기를 붙잡고 불규칙하게 걸어오는 전화라서. 구식, 대남, 용팔이 깊은 잠을 자는 날에는 백호의 전화를 못 받곤 했다. 호열만이 백호의 전화를 놓치지 않고 받았는데 비결이 뭐냐는 세 사람의 질문에 호열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침대 협탁에 전화기를 놓고 음량을 최대로 키워두었지. 그때의 세 사람은 정말 징한 놈이라고 혀를 찼다.

오늘은 합주 연습하다가 구식, 대남, 용팔이 호열의 집에 묵고 있는 덕에 오랜만에 백호 군단의 목소리를 듣는 강백호는 굉장히 들떠있었다. 물론 오랜만에 강백호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도 들떠버렸고.

“백호야! 한국 다음 주에 들어오지?”

엉! 벌써 짐도 다 싸놨지! 이번에는 좀 길게 있을 거야!

“강백호! 선물은? 내 선물 샀지?!”

대남의 물음에 강백호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울린다. 야! 당연히 챙겼지! 기대해!

“아, 맞다. 백호야, 우리 다음 주에….”

“이런. 백호야 너 이제 나갈 시간 아니니?”

용팔의 말을 끊고 묻는 호열의 물음에 백호도 놀랐는지 잠시 당황한다.

-어? ……눗, 벌써 시간이! 나 가야겠다! 또 전화할게! 어, 잘 자!

무언가 우당탕 소리가 나며 전화가 끊기자, 세 사람의 시선이 호열을 향한다. 누가 봐도 공연에 대해 일방적으로 말 끊은 이유를 말해달라는 시선들에 결국 호열은 두 손을 들었다.

“말 끊어서 미안해.”

“됐고, 사과 말고 이유를 이야기해.”

대남의 대답에 호열은 잠시 망설인다. 한참 고민하는데도 구식, 대남, 용팔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호열이 이유 없이 상대방의 말을 끊으면서 주제를 돌렸다는 것은 분명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란, 단단한 믿음에서 나오는 기다림이었다.

대답은 한참 후에 들을 수 있었다.

“…… 이번에 백호 한국 오는 거 말이야. 난 지난번에 이야기 들었거든. 지금 소속된 구단하고 이번 시즌까지만 계약 후 종료한대. 그리고 한국에서 선수로 뛰다 은퇴하고 싶다네.”

“뭐?! 지금 구단이 제일 연봉 많이 챙겨줬잖아? 근데 계약 종료한다고?”

“응, 이번에 귀국하는 건 한국 구단들과 만나려고 오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세 사람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걔 연봉 맞춰줄 수 있는 국내 구단이 있나?!”

“아니, 못할걸. 당연히 낮추겠지.”

“굳이 몸값 낮추면서까지 왜 돌아와?”

“왜겠냐.”

외로웠대.

호열은 괜스레 뺨을 긁적였다.

“너네에겐 말 안 했는데, 그동안 백호가 많이 힘들어했어.”

세 사람은 믿을 수가 없었다. 회사 일에 지친 이들이 작은 가게에 몸을 웅크리고 모여 앉아 술을 나눠 마시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그 강백호가. 백호 군단에서 가장 빛나는 별. 반짝이는 스타.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자신들은 상상도 못 할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가장 좋아하는 농구를 하는 자신들의 친구. 너는 걱정이 없겠지. 너는 행복 할 거야. 너는, 강백호는 즐거울 거야. 막연히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영어도 잘 못하는 애가 커다란 미국이라는 땅에서 겪을 일들이야 당연히 힘들었겠지만. 그런 힘듦이야 이제 지금의 강백호에게는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해준 과거일 뿐이라고. 이제는 성공했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그런 강백호가 향수병?

세 사람의 표정이 굳어지자, 호열은 이럴 줄 알았다며 이마를 짚었다.

“백호에겐 내가 말했다고 말하지 마라. 백호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줘.”

“야, 당연하지.”

“뭐 좋은 일이라고 애가 또 말하게 하냐. 됐어.”

“그거랑 우리 공연하는 거 말 못 하게 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용팔은 썼던 안경을 치켜올리며 호열의 말을 끊었다.

“설마, 백호가 온전히 국내 구단 계약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우리 공연이야 다음에 또 할 때 이야기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지금 공연이 문제인가? 구단 계약이 먼저지. 라는 생각은 아니지?”

“…… 이용팔이 너.”

호열은 정색하며 용팔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식당 때려 치고 돗자리 펴라.”

“아오! 이 미친놈아!”

 

 

“저… 팀장님 봤어요!”

연습으로 잠을 잘 자지 못하여 퀭한 눈으로 블랙커피를 내리던 호열은 자신을 향한 당돌한 신입 사원의 불륜 드라마 대사 같은 말에 고개를 돌렸다. 네? 바람 빠진 풍선같은 호열의 물음에 신입 사원은 방금 탄 쌍화차를 그대로 원샷 하더니, 숨을 고르다가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소리 지른다.

“팀장님 밴드 하시죠?!”

호열은 바로 그 사원을 끌고 옥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잠시 옥상의 바람을 맞으며 서부 시대 총잡이들처럼, 신입 사원을 마주 보고 서 있던 호열은 최대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저, 저도 팀장님 다니시는 음악학원에 등록했거든요. 아, 전 피아노 배워요.”

“그러니까. 음.”

호열은 이 신입 여사원의 이름을 생각하다가, 상대가 불쾌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에 이름을 생각해 냈다.

“희수 씨.”

“네, 팀장님.”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요. 뭐, 사생활이잖아요.”

“이번 주에 공연하는 것도요?”

요즘 20대는 이렇게 돌직구를 잘 날리는구나.

“…… 그것까지 알아요?”

“원장님이 알려주셨어요.”

김대남의 손님이었다는 그 원장, 생각보다 입이 가볍다. 조심하라고 해야겠군. 잡아떼긴 글렀으니, 고개를 끄덕이는데 김희수 사원은 묘하게 호열의 눈치를 보며 난처한 얼굴이다. 그런데요, 팀장님.

“이미 부서 사람들에게 다 말해서, 저희 팀장님 응원가기로 했는데.”

황금 같은 토요일 저녁에, 직장 상사의 밴드공연을 보러 온다고? 다들 할 일 없어? 회사 일이 너무 무료해서 이런 개꿀잼 특별 이벤트 놓칠 수 없다며 정신을 놓아 버린 건가?

호열은 잠시 하늘을 보다가, 제 눈앞에서 사고 친 강아지처럼 눈치 보고 있는 신입 사원에게 겨우 말했다. 미안한데.

“담배 한 대 피우고 내려갈 테니 먼저 내려가 봐요.”

 

 

이때까지도 호열은 크게 별생각이 없었다.

회사 사람들이 자기가 밴드 하는 걸 알았다? 어쩌라고. 죄지은 것도 아니고 부끄럽지도 않다. 황금 같은 주말에 상사 공연을 보러온다? 뭐, 자신이 그만큼 직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니까, 공연 당일 대남과 구식이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폭소하면서 대기실 문을 박찰 때까진 말이다.

“야! 양호열네 회사 사람들이 플래카드랑 단체복 맞춰 입고 지금 소리 지르고 있다!”

“최강 섹시 보컬 양 팀장이라는데?! 하하하학!”

호열이 그런 튀는 행위를 싫어하는 것을 아는 용팔만이 비웃지 않고 그를 진지하게 위로해 준다.

“너희 직원들 미친 것 같아. 너도 미쳐서 그런가.”

호열은 진지하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공연 보러 오는 이유가 회사 사람들이 나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한 장소에서 표출하기 위함이었나.

그러나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고 백호 군단 밴드는 여섯 번째로 입장한다.

“섹시 양 팀장님, 준비 되셨습니까?”

“마이크로 기타 부수기 전에 조용히 하시죠.”

“슬슬 준비하자, 이제 우리 순서야.”

“아 맞다, 호열아.”

구식은 호열의 어깨를 툭 쳤다.

“스페셜 게스트도 왔다?”

“…… 우리 회사 사장님이라도 오셨냐?”

“글쎄? 관객석 잘 봐봐.”

넌 아마 바로 알 걸?

 

 

화려한 형광 하늘색 후드티에 번쩍이는 전구까지 붙인 플래카드. 거기에 적힌 도전, 도발적 문구. 양호열과 같은 팀의 조은호 대리는 마치 하늘을 뚫어버릴 기세로 치켜 올라간 선글라스를 벗고 열심히 섹시한 양팀장님 얼른 나와라! 라고 외치는 이 일의 주최자인 팀 막내 사원에게 물었다.

“저기. 희수 씨. 정말 팀장님이 좋아하실까? 난 좀 걱정되네. 팀장님 성격에, 우리 이러는 거 엄청나게 싫어하실 것 같은데.”

“네? 왜요? 이렇게 우리가 팀장님을 응원해요! 라는 게 팍팍 느껴지지 않나요?”

어어, 너무 느껴져서 그게 문제인 것 같은데. 조은호 대리의 말에도 김희수 사원은 그저 해맑다. 대리님 그 선글라스 잘 어울리시네요! 그 옆에서 해탈한 얼굴로 소싯적 아이돌 콘서트에서 야광봉을 화려하게 흔들었던 경력을 살리고 있는 이은정 사원은 황금 같은 토요일에 직장 상사의 공연을 봐야 한다며 끌려 나온 피해자다.

“…… 이게 맞나.”

“아이! 정말 팀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다니까요?”

“Hey.”

김희수 사원은 높은 곳에서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꺄악! 꽤 크게 터진 비명에 말을 건 상대도 당황했는지 허둥지둥한다. 영어로 불렀던 목소리는 거칠고 낮은 목소리였는데 다시 들리는 한국말은 전 목소리보다 부드러웠다.

“아. Excuse, 아니! 노, 놀라셨나요? 후눗, 죄송합니다!”

“…… 네에? 저요?”

김희수 사원의 키가 작은 편이긴 했지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이 남자, 엄청나게 크다. 거대한 벽 같은 느낌이랄까. 혹시나 클럽에서 여자들에게 수작 부리는 무뢰배인가 싶었는지 조은호 대리와 이은정 사원이 양옆으로 붙었다. 자신을 경계하는 사람들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거대한 남자는 굵고 긴 검지 손가락으로 조은호 대리가 들고 있던 플래카드를 가리킨다. That's it! 아니, 그거 말이에요!

“양호열 맞죠?”

씩 웃으며 모자를 벗는 남자의 머리칼은 클럽의 어둡고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보아도 구분되는 선명한 붉은색이다.

 

 

태양계 행성에서 두 번째인 수성.

가장 거대한 태양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작은 그 행성이, 왜인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학생 시절을 지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굳어버린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에게 어울리는 곡이라 생각했다.

깜깜한 무대에 올라 마이크 스탠드 앞에 섰다. 슬쩍 주변을 보니 모두 준비를 마친 듯하다.

공연을 시작하기 전의 긴장감은 언제나 호열의 흐려진 감각을 또렷하고 날카롭게 끌어올린다. 불 꺼진 관객석을 바라보며,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마이크 스탠드를 입에 대고 말한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백호 군단 밴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저희가 부를 곡은-.”

지잉-.

대남의 기타 울림이 이어지면서 조명이 밝게 켜진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

호열의 뒷목을 따라 기분 좋은 소름이 돋는다.

“수성의 하루입니다. 즐겁게 들어주세요.”

 

 

잠시 공연 시작 전의 강백호를 살펴보자.

강백호는 한국에 입국 하자마자 호텔에 짐만 던지고 바로 뛰쳐나왔다.

공연 시작까지 앞으로 1시간 20분! 비행기 타러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구식의 통화에서 자기 친구들이 입국 날 공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양호열! 이 재밌는 일을 왜 이야기 안 한 건데?! 사실 백호 군단들이 밴드를 결성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 번도 그들이 연주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강백호는 그들의 연주 실력이 그냥. 고등학교 학예회 밴드 수준이겠지? 하며 택시에 올라탔다.

도착한 클럽 내부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고, 큰 몸을 억지로 밀어 넣어 무대 바로 앞까지 갔을 때, 화려하게 번쩍이는 호열의 직장 동료들도 만났다. 플래카드의 ‘최강 섹시 양팀장님’이라고 적힌 글자를 보고 눈을 좀 비비긴 했는데. 섹시한 양팀장님이라니. 호열이가 섹시한 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물어보려다가 꾹 참았다.

몇 번의 무대가 끝나고 불 꺼진 무대 위로 익숙한 얼굴들이 나온다. 모두 흰 셔츠로 맞춰 입은 백호 군단이다. 구식이가 베이스, 대남이가 기타. 용팔이가 드럼이야? 그럼, 호열이는? 마이크 스탠드 앞에 서서 숨을 고르는 호열의 모습이 보인다. 양호열은 보컬이야?! 경악하며 그의 이름을 외치려는데 부드럽게 울리는 인사말이 스피커를 통해 울린다. 웃는 얼굴. 기타의 울림. 강백호는 파도처럼 자신에게 쏟아지며 울리는 음악을 느꼈다. 귓가에 울리는 함성.

시선과 환호성이 자신의 오랜 친구들에게 향한다.

빛나고 있다.

정말로, 반짝반짝.

“…… 우와.”

용팔이 치는 드럼 소리에 맞춰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 같다. 대남의 빠른 기타 소리가 기분을 고조시키고 구식의 베이스는 가장 뒤에서 묵직하게 중심을 지킨다. 그리고, 호열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두 눈은 맑게 빛나고, 무대를 여유 있게 걸어 다니며 관객들의 눈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그 모습은 정말…….

 

어. 지금.

호열이랑,

눈이-.

마주쳤다.

 

 

공연이 끝나자, 강백호는 호열의 직원들과 함께 친구들을 기다렸다.

곧 악기들을 매고, 땀으로 젖은 백호 군단이 나타나 부른다. 야! 백호야!

몇 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반가워서 펄쩍 뛰며 다가가는데 호열이 웃으면서 빠르게 가까워진다. 역시! 양호열! 너도 나 보고 싶었지?!

“야! 호열아! 너 진짜 노래 잘하더….”

“백호야. 나 잠깐만.”

호열이 백호를 스-윽 스치고 지나가, 뒤 쪽에 서 있던 회사 직원들에게 다가간다. 우와. 아니, 진짜 이러고 온 거에요? 팀장님! 진짜 멋졌어요! 노래 정말 잘하시던데요? 이거 문구 쓰신 분 누구입니까? 상사 희롱으로 시말서 쓰고 싶어요? …… 업무 외 시간에 있었던 일이니, 시말서는 안 써도 되지 않나요? 아, 거 봐요! 싫어하실 거라고 했잖아.

몇 년 만에 만난 자신을 두고 회사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호열을 보니 왠지 모를 서운함에 입술이 절로 삐죽 나온다. 그런 백호의 오른쪽 어깨에 노구식이 팔을 턱 걸친다.

“이야, 슈퍼스타. 왔어? 시간 잘 맞춰 왔네.”

“눗, 왔다. 공연 잘 봤어. 너희 엄청나게 잘하더라.”

이번엔 왼쪽 어깨에 김대남이 팔을 걸친다.

“근데 우리 천재 왜 심통이 났냐? 아-. 호열이가 너 신경 안 써줘서?”

“아, 아닌데?!”

“아니긴, 입이 이만큼 나와 있구먼.”

이용팔이 낄낄 웃으면서 주먹으로 백호의 복부를 툭 치며 말했다.

“야야. 재미있는 거 말해줄까? 아까 무대에서 너 호열이랑 눈 마주쳤지?”

“응, 그런 것 같았는데. 바로 고개 돌리던데?”

용팔은 백호의 대답에 웃음을 참으며 말한다.

“너 양호열 귀 못 봤냐?”

“귀?”

“아~. 난 불붙은 줄 알았어.”

강백호가 왔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호열의 손이 미묘하게 떨리면서 귓가가 붉어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공연에서 절대 떨지 않았던 호열이었는데.

그 말에 강백호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역시 호열이도 날 봤구나. 날 의식하고 있었네. 묘하게 뿌듯함이 든다.

어느새 클럽 입구에서 직장 동료들에게 자신의 카드를 건네주며 와줘서 고마워요, 이걸로 밥 사 먹어요, 말하는 호열을 바라보았다. 떠나는 직장 동료들을 배웅한 호열은 피곤한 얼굴로 그제야 백호에게 다가왔다. 백호야.

“공연 잘 봤어?”

“엉! 잘 봤지! 너는 왜 나한테 미리 말 안 했냐! 구식이 아니었으면 못 볼 뻔했잖아!”

“미안, 미안해. 내 생각만 했네. 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

강백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호열에게 이번 귀국이 국내 구단과 계약 건으로 오는 것이라 미리 이야기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배려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건 배려가 아니지!

“담에는 그러지 마. 너희 일에 날 빼지 말라고. 나도 백호 군단이야.”

“응, 미안해.”

호열은 말간 얼굴로 순순히 사과한다. 그럼에도 강백호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호열은 웃으며 백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야! 그 유명한 강 선수가 저희 공연을 봐주시다니! 영광입니다!”

“…… 췟.”

“오늘의 스페셜 게스트가 강 선수였군요! 혹시 강 선수 배 안 고프십니까? 밥 먹으러 갈까요? 제가 사겠습니다!”

능청스러운 호열의 상황극에 다른 친구들도 가세한다.

“어머! 요 길 건너에 한식당이 있는데 그렇게 맛집이래요!”

“꺅-! 저도 알아요! 그 집 사장님이 그렇게 손맛이 좋다는데요?”

“눗? 어, 어디인데?”

“용팔 사장님! 빨리 사장님네 가게 안내해 줘요.”

되지도 않는 하이톤으로 요사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구식과 대남을 보던 용팔은 펄쩍 뛰었다.

“야! 나도 남의 가게에서, 남이 해준 음식 편하게 먹고 싶다고!”

“후눗! 맞다! 용팔이 식당 하지? 나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 뭐하냐, 이놈들아. 가자. 실력 발휘 해준다.”

“꺅! 사장님 최고!”

두툼한 용팔의 양팔을 연행하듯이 끌고 가는 구식과 대남의 뒤로 백호와 호열이 따라 거리를 걸어간다.

밤거리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과 거리의 수많은 사람 속에 강백호가 여기 있다. 미국이 아니다. 전화기 너머도 아니고.

공연 중에 자신을 바라보는 강백호를 발견했을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집중할 때의 그 눈동자. 꼭 농구공을 바라보는 듯한 날 것의 눈빛. 호열은 아직도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께를 주먹으로 통통 치며 긴장을 낮추었다.

백호는 그런 호열을 힐끗 보다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야, 호열아.

“오늘 너희 말이야.”

“응?”

“무대에서 있잖아. 엄청 엄청 반짝였다?”

“으응? 조명 때문에?”

“아니! 바보야! 막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러니까.”

백호는 슬금슬금 양팔로 호열의 어깨를 감싸 기대듯 안는다. 아이고 무겁다, 백호야. 호열은 투덜거리면서도 거부감 없이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데.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사람들의 표정은 엄청나게 빛나거든?”

“응?”

“다른 애들도 빛났는데, 특히. 호열이, 네 얼굴이 제일 빛나더라.”

“…… 으으응?”

“꼭 별 같이 반짝였어. 엄청 멋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백호의 미소에, 호열은 자신도 모르게 따라 미소 지었다. 이제는 붙어있던 시간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더 길 텐데,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강백호는 여전히 강백호다. 강백호는 호열을 그대로 꽉 안더니, 팔짱을 끼고 앞서가는 구식, 대남, 용팔의 옆으로 달려갔다. 용팔의 가게에 가는 동안 백호 군단은 오늘 공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백호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는 친구들.

 

태양이 별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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