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Just Gotta Breathe In Breathe Out
직장인이란 무엇인가? 회사의 노예, 매일 아침 출근이라는 엄중한 임무를 맡는 불운을 짊어진 존재, 퇴근 후 반드시 자기 계발이니 취미 활동이니에 시간을 쓰겠다고 다짐하지만 언제나 다짐만으로 그치는 가련한 인생을 이른다. 9 to 6는 얼핏 그럴싸하게 들린단 말이지. 그건 실제로 적용했을 때의 결과를 의도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일종의 사기다.
짧은 시곗바늘이 숫자 6을 가리키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면, 그다음은 동안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고 1시간 30분을 버텨야 한다. 겨우 집에 돌아와 저녁을 챙겨 먹으면 벌써 8시를 넘어가고. 아, 저녁 메뉴를 배달 음식이나 간편식품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아마 9시에 가까운 시간일 것이다. 아침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서두르느라 엉망이 된 방바닥 꼴을 정리하고, 밀린 3대 집안일-청소, 빨래, 설거지-이라도 하려고 마음먹은 날이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다. 그렇게 쳇바퀴를 돌리듯 정해진 매일을 온 힘 다해 살아내는 사람들.
…그런 게 직장인이지. 제발 그런 직장인이 되고 싶다. 저녁 10시 47분, 칼퇴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자판을 두드리다가 시계를 확인한 양호열은 간절히 바랐다. 제발 6시에, 아니, 9시에라도 퇴근할 수만 있다면 9 to 6가 사기라느니 그런 생각은 갖다 버리겠습니다. 제발 퇴근 좀 시켜주세요. 제발!
양호열이 처음부터 이렇게 야근에 시달리는 블랙 회사 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니다. 그의 회사는 정시 퇴근을 장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야근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기업이었다. 잔업이 남았어도 7시에는 끝낼 수 있을 만한, 그런 일상을 마치고 나면 그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다만, 집으로 가는 방향은 아니었다.
짧은 시곗바늘이 숫자 6을 가리키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면, 그다음은 동안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고 1시간 30분을 버텨야 한다. 집이 아니라 연습실로 향하는 동안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오늘 합을 맞춰볼 곡을 재생한다. 곡의 박자와 호흡 같은 것을 생각하며 연습실 문을 열면,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얼굴들이 양호열을 맞는다. 드럼 스틱을 꺼내던 이용팔과 베이스를 앰프에 연결하려던 노구식이 고개를 돌려 막 도착한 그를 보곤 가볍게 몇 마디를 건넨다. 왔냐? 어. 김대남 안 왔어? 걔 오늘 좀 늦는대. 그래? 엉. 새로 온 알바가 실수해서 미용실 바닥이 물바다랜다. 일단 기타 없이 하고 있으면 오겠지, 뭐.
이들과 밴드를 결성한 지는 꽤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강백호가 농구라는 걸 찾고 반짝반짝 빛나던 그 나날들. 나머지 백호 군단도 저희만의 '농구'를 찾으라는 백호의 등쌀에 못 이겨 이것저것 시도했다. 요리, 스케이트보드, 각종 동아리 체험...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다가 정말로, 찾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4명이 한꺼번에. 사실 강백호가 농구에 몰두하는 만큼 음악을 대단히 사랑하는 건 아니겠지만, 김대남도 양호열도 노구식도 이용팔도 함께 합을 맞추는 과정을 좋아했다. 오랜 친구들과 함께 투닥거리며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을 사랑했다. 가끔은 밴드 활동뿐이라고 생각했다. 노래만이 유일하게, 의지할 데라곤 서로뿐인 우리들을 표현할 수 있었다.
한번 정을 붙인 다음부터는 강백호가 질투할 만큼 합주 연습을 해댔다. 새로운 용어를 배우고, 밸런스를 맞추는 법을 몸에 익혔다. 세상에 서서히 넓어지는 그 모든 시간에 음악이 함께했다. 고등학교 밴드 동아리방에서 마음껏 소리를 내는 동안에는 이 매력적인 연주를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 성인이 되자 그만두는 인원이 생겼다느니 그런 문제는 안 생겼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밴드 이름부터 정했는걸. 그냥... 다들 바빠진 거지. 양호열은 컴퓨터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돈 벌고 일상을 유지하느라 모이는 시간이 자연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합이 들어맞는 그 짜릿한 순간을 잊지 못해서 몇번이고 모여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밴드 군단(軍團)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 열정이 무색하게도 최근 군단의 합주 연습은 차일피일 미뤄지거나, 한 사람을 빼고 진행되고 있었다. 양호열의 야근으로 보컬 없는 합주만이 계속되는 바람에 완전한 연주는 거의 못 해본 채다. 그는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발 퇴근 좀 시켜달라고. 우리 공연해야 한단 말이야!
그러나 그토록 간절한 바람도 회사 사정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양호열의 야근 행진이 멎을 날은 요원해 보였다. 이미 정시 퇴근은 포기한 지 오래였고 10시 이전 퇴근이 하루의 가장 큰 목표일 지경이었다.
회사로서도 변명이라면 변명일 사정이 있었는데, 원래 다른 팀에서 진행하던 큰 프로젝트 하나가 날아갔다나 뭐라나. 물론 여기까지가 대외적인 이유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높으신 분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던 프로젝트라 TF팀에 과도한 권력과 재정력을 쥐여줬던 것, 그리고 그 높으신 분을 견제하려는 회사의 또 다른 높으신 분이 팀 내부에 자기 사람을 심어둔 게 화근이었다. 그러니까, TF팀 내에서 사내 정치 싸움 대리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지만 당시 양호열은 대수롭잖게 생각했었다. 우리 서 부장님이 라인 댄 권력자께서 정치 싸움을 하신다니 소문이야 귀에 들어왔지만 어쨌든 TF팀 짜서 나가셨으니, 내 일은 아닌 거지. 대충 그런 생각이었다. 우리 팀만, 내 일만 아니면 돼. 난 오늘도 칼퇴해서 연습실 가야 한단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합주곡은 무슨 노래로 할지 리스트를 뽑아보고 있었으니 아, 꿈처럼 느껴지는 과거로다. 평소와 같은 견제와 눈치 싸움으로 끝나리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사건이 터졌다. TF팀 팀장은 공금 횡령으로 내부고발 당했고. 회사는 난리가 났다. 기회를 잡았다는 듯 상대방 측에서는 저놈 혼자 한 게 아닐 테니 뒤를 봐준 인물을 잡아내야 한다느니 뭐라느니. 기세등등해져서 이 기회에 뿌리를 뽑아버릴 기세로 공격을 감행했다. 부장의 안색은 질리다 못해 썩어들어갔고 마침내 TF팀 팀장직 후임이 정해지자 부장은 차라리 시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몰골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직후, 한 팀원이 타사에 사내 기밀 유출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기밀을 빼돌려 팔아먹으려고 했다던 팀원은 높으신 분이 TF팀 견제 역할로 심어둔 그 사람이었다. 마치 짠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들어온 라이트 훅에 성급하게 쌓아 올린 모래성이 무너져 내렸다. 양쪽이 사이좋게 엿 먹고 손을 떼겠다고 하는 바람에 TF팀은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시작은 우리 부장님네 이사님 쪽 내부 총질이었다지, 아마. 공금 횡령 고발 건 자체가 이쪽 인사의 실수로 사태가 커진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참, 누가 실수했는지는 몰라도 업보 제대로 받겠는걸. 그런 한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고 정확히 3시간 뒤, 양호열은 그 업보를 받을 멍청이가 누구인지 알아채고 말았다. 그야, 팀이 공중분해 되면서 폭탄 돌리기의 폭탄이 된 프로젝트를 부장이 들고 왔으니까.
부장은 TF팀이 과도한 권력을 갖는 게 못마땅했고, 내부 견제를 위해 팀장의 뒤를 캐다가 공금 횡령 사실을 알아버리고 만 거다. 그걸 어쩌다 자기 윗선인 이사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세력에게 흘려버렸고, 사태가 커졌다. 이 시점에서 이사 라인 내부에서 부장의 권력은 바닥을 쳤을 테다. 맞불 작전으로 겨우 진정된 후 붕 떠버린,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프로젝트를 떠맡겨도 아무 말 못 할 만큼.
양호열은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함께 식사한 동료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난리가 났는데 태연하게 점심시간에 커피나 마시면서 사원들이 떠드는 가십거리가 됐군. 회사 개판이야, 아주. 사고가 뚝뚝 끊기면서 단편적인 감정만이 둥둥 떠오른다.
정치질이나 하면서 진행한 프로젝트가 잘 굴러갔을 리가 없다. 다시 진행해야 하는 것, 괜찮은 것을 분류하는 작업에만 한참을 매달려야 할 테고 겨우 정리가 끝나면 프로젝트를 제시간에 정상화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해야 할 게 뻔히 보였다. 내가 왜 부장 뒤치다꺼리나 해줘야 한단 말인가?
처음엔 그렇게 화를 내고 부장을 욕하며 일을 쳐내느라 몸이 잔뜩 긴장했는데 이젠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의욕이 없다. 이 모든 일들에 지쳤다. 사내 권력 싸움에 휘말리는 것도, 남이 받아야 할 업보를 대신 받는 것도. 그 사실에 분노하고 짜증을 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게 벌써 며칠째 야근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전부 의미 없이 느껴진다. 일도, 퇴근도, 노래도, 삶도. 퇴근해봤자 잠만 자고 다시 회사 올 거면 차라리 회사에서 자는 게 시간 아끼고 좋겠네. 마지막으로 힘껏 노래를 부른 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러다간 노래 부르는 법조차 까먹을까 겁이 난다.
쌓여만 가는 사적인 메시지 알람 속에는 분명 밴드 관련 내용도 있겠지. 보컬이 매번 연습에 빠지니 얘네도 애가 탈 거다.
초조와 피곤이 한 데 섞여 배 속을 헤집는다. 토할 거 같아.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마음이 허물어질 것만 같다. 무릎 위에 둔 핸드폰 액정 위로 이름 하나가 빛난다. 일부러 회사 생각이나 하면서 의식에서 가려둔 네가 보고 싶다. 일부러 생각 저편으로 밀어놓은 네가 그리워 죽을 것 같다. 손가락이 몇번이고 통화 버튼 위를 헤맨다. 짓무른 마음이 버튼을 누르라고 재촉한다. 메마른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가락이 액정을 두드린다.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통화 연결음이 흐르다가, 흐르다가, 벌써 자나. 그냥 끊어야,
"엉, 호열아!"
"백호야…."
나 너무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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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열!!!!!!
침대에 뻗어있던 호열을 와락 껴안은 백호는 그 상태 그대로 아무 말이 없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호열은 백호가 분노를 겨우 참아내고 있음을 알았다. 이런, 이 정도로 화낼 줄은 몰랐는데.
"…왜 그랬어?"
"…."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으음…."
"호열아, 자꾸 파고들지만 말고. 왜 말 안 했어."
그야 너 시즌 중에 괜히 신경 쓰일까 봐 그랬지. 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걱정만 시켜서 뭐 해.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진짜 망한다는 걸 알고 있는 양호열은 침묵을 택했다.
"호열아, 내가 니 애인인데 이 지경이 되어서야 아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미안."
진짜 미안한데, 좀만 더 꽉 안아주라. 나 너무 힘들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아, 양호열 진짜…."
"미안해…."
"눗…."
거대한 질량이 반쯤 누운 몸을 압박하는 감각이 기껍다. 부장의 몰락 스토리를 주워섬기며 필사적으로 존재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쓴 연인이 지금, 눈앞에 있다. 나를 품에 가두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 추궁한다. 걱정과 서러움이 반씩 섞인 질책에 빠듯하게 차오르는 마음이 부끄럽다.
"이번엔 그냥 못 넘어가. 너 이번에도 나 경기 뛰는 것 때문에 그랬지!
"…아니?"
"거짓말 치지 마라, 양호열. 내가 널 모르냐?"
"아니, 이번엔 진짜 그냥 바빠서..."
"나 진짜 서운해."
"아아, 백호야아."
사랑해서 그랬지. 사랑해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 정도로 네가 소중해서.
"진짜 별거 아니야. 그냥 좀 안아주라. 그거면 다 괜찮아."
"…."
"어허, 가자미 눈 금지. 응?"
활짝 펼친 두 팔에 감당 못 할 만큼 거대한 덩치가 파고든다. 더운 기운이 훅 풍긴다. 네 몸은 항상 따끈따끈해서 껴안고 있으면 마치 태양을 껴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같이 씻을까?"
얘가 미쳤나.
"진짜 딱 씻겨주기만 할 거거등?! 양호열 변태!"
"못 믿겠는데…."
"헹, 누굴 바보로 알아. 너 지금 힘들어 죽겠는 거 다 알거든."
"그 정도는 아닌데."
"씻겨줄게."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같이 집 데이트하자. 침대에 드러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껴안고만 있는 거야. 그러다 심심해지면 발장난을 치고, 배고파지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자. 살갗을 겹치고 온기를 나누다가 그대로 잠들자.
"너 주말에 자율 훈련 있잖아."
"한 번쯤 빼도 돼."
"나도 출근할 수도 있어…."
"저녁에 내가 회사로 가서 너 픽업할까?"
일이 좀 줄어들면 어디 공기 좋은 데로 놀러 가자. 맛집도 찾아가고 하루 종일 꽃이나 돌담이 유명한 관광지만 돌아다니면서 사진 잔뜩 찍고 놀자. 어때, 좋지. 어디로 갈까? 결국 볼을 타고 흘러버린 눈물을 훔치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다.
아, 너와 함께 있으면 초여름의 더운 햇살이 나를 비추는 것만 같다. 짙은 피곤과 깊은 우울을 모두 씻겨내는 태양 같은 사람. 어두운 동굴에서 기어나와 맑은 아침 해를 마주한 사람처럼 숨이 트인다. 새벽 2시를 넘어가는 시간인데 너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아침 공기를 느껴.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죽였던 숨을 트이게 하는 맑고 선명한 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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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이번 공연 준비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회사에서 야근을 그렇게 시키더라고요."
"그때의 마음을 담아서 <죽어버려라>를 부를까 했는데,"
"이번엔 좀 다른 노래를 부르려고요. 힘들 때 절 위로해 준 사람이 있어서요."
"Blanks - Breathe In Breathe Out입니다."
I just gotta breathe in, breathe out
Breathe in, breathe out
나 숨 좀 쉬게 해주세요,
숨 쉴 틈 좀 주세요
I've been high, I've been low
I've been running from the radio
It got me feeling oh so lonely (oh, so lonely)
그래, 외로웠지.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먼저 숨긴 건 이쪽이지만 외로운 건 외로운 거였다. 네가 날 위해 새벽에 달려와 훈련도 빼겠다고 말하는 데서 저열한 만족을 느낄 만큼 외로웠다.
The sunlight sets me free
Oh, this is all I need
내 태양, 나를 자유롭게 하는 아침 해. 그런 게 있다면 단 하나다.
I just gotta breathe in, breathe out
네가 날 숨 쉬게 해. 이 반복되는 매일을 네가 있어서 견딜 수 있어.
Call a friend, leave the house
Maybe take a different road
그래, 나가자. 우리 전혀 모르는 곳으로 가서 놀자.
I just wanna feel the sunshine
너와 함께 있으면 어디든 햇빛을 느낄 수 있을 테니
Get a car, enjoy the ride
Tell me where you wanna go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