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일의 시작은 20살이 된 그 해 졸업식 날이었다. 정말로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에 싱숭생숭하고, 하필 늘 무리의 중심이었던 큰 티라노 같은 친구 놈은 유학을 간다더니 그곳 일정을 맞춰야 한다면서 졸업식도 참여하지 못했다. 나중에 챙겨갈 테니 졸업장은 대신 챙겨달라나 뭐라나.
사귀는 것으로 오인 당하였던 채소 연은 다른 애들에게 "백호, 걔 너무하지 않니?"라며 위로를 받았는데, 달리 할 말도 없어서 어색하게 "그런 거 아니라니까……."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진짜 차인 사람은 따로 있는데.
양호열은 콧등을 찡그리면서 괜히 크게 훌쩍거렸다.
"그렇게 춥냐? 이 새끼 가오 없게 추위 존나 타."
"가오랑 무슨 상관이야. 독감 걸리면 답도 없다."
"겨울에 얼음 아작아작 씹어 먹을 것처럼 생겨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취급을 하며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주의를 돌렸다. 입술이 텄다. 계속 물어뜯어서일지도 모른다. 목도리 속에 고개를 처박고,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넣고 성큼성큼 걸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걸 잃었는데, 그걸 어떻게 채워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실연을 당한 양호열은 그렇다 쳐도, 다른 놈들도 영 직장을 바로 잡지 못하고 뭉그적거렸다.
"너희 왜 그러고 사냐?"
"양호열 너는 계속 알바 한다고 해서 우리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우리도 할 게 필요하다……. 학교도 안 가고 이제 무슨 재미로 사냐."
"동반 입대라도 하던가."
"이 청춘에 바로 군대를 갈 수는 없어! 뭔가, 뭔가 재밌는 걸 해야만 해! 재밌고, 간지나고! 품새 사는, 청춘이라 할 수 있는 그런 거!"
"뭐, 배낭여행이라도 같이 가줘?"
커피를 홀짝이면서 피식 웃으며 대꾸해줬던 양호열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 청춘 타령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줄은.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목을 한 번 더 가다듬었다. 다른 놈들은 제각기 악기가 제대로 있을지 걱정이라면서 발을 동동 구른다. 리허설 때 테스트는 몇 번이나 해 놓고서는. 다른 밴드 동호회들과 함께 돈을 모아 연 공연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버렸다. 어디서 이렇게 모였나, 했더니 슬그머니 시선들을 피하는데, 구대용 삼총사가 알아 온 바에 의하면 몰래 양호열 사진을 자주 찍어 올렸다고 한다.
그래봤자 흔하디흔한 인상일 뿐인데. 아무래도 폼 잡고 있는 걸 열심히 찍고 괜찮게 올렸나보다. 그것 뿐 아니라 다른 동호회에는 인맥이 넓은 사람들도 여럿 있고, 양호열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스시 집에 채용이 되었는데, 사장이 양호열의 취미 생활을 단골들에게 다 떠들어버리는 바람에 구경 온 사람들도 몇 있었다.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지 아주 가득 찬 것도 아니고 열광적인 관중도 아니다.
하지만 무대는 늘 바짝 긴장이 된다. 목이 타서 생수를 들이켰다. 적당히 마셔야 하는데, 자꾸 긴장이 돼서 들이키게 된다. 목을 다시 점검한다. 오늘 목 상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또 어떤 돌발 상황으로 바보 같은 실수를 할지 모른다.
"다음 차례는 백호 군단입니다. 환호와 박수로 맞아주세요!"
의례적인 소개와 함께, 기계적인 박수 소리가 들린다. 양호열의 마음이 이쯤 되자 차게 식었다. 공연 직전이 되면 손발이 차가워지고,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무대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는 다른 사람들과는 정반대다.
양호열은 한숨을 쉬고 무대에 올라갔다. 가죽바지를 입고 성큼성큼 걷는 그의 동작을 모두가 집중하고 있다.
파란기가 도는 백색 조명이 눈이 아프게 비친다. 눈을 깜빡이면서 빛에 익숙해진다. 관객에 앉은 사람들은 한 치도 보이지 않는다. 마이크를 꽉 쥐었다. 그래, 지금 신경 쓸 건 무대 위다. 드럼이 신호를 주며, 반주가 시작된다.
양호열은 그날 리즈를 찍었고 사람들이 대거 팬이라며 유입되었다. 자작곡 하나 없는 취미 밴드 치고는 꽤 반응이 좋았다. 연예계 관계자라며 몇몇이 명함도 주었지만 보나 마나 사기꾼이라 대충 버리려는 명함을 구식이가 낚아챘다.
"야, 이게 얼마나 귀중한 건데 막 버리고 그래! 이런 거 많이 받아봤다 이거냐?"
"사기꾼일게 뻔하니까 그러잖아. 대체 뭘 믿고 그 번호로 전화해?"
"우리한테 사기를 쳐봤자 뜯어먹을 것도 없어!"
"없기는 왜 없어. 뜯어내려면 속옷까지 뜯어내는 게 사기꾼이야. 너랑 얘. 쟤 악기만 팔아도 꽤 짭짤하겠다."
"넌 자꾸 사람을 의심하더라. 원래 안 그랬는데 어쩌다가 애가……."
"우리 어른이야. 밴드는 재미로 하는 거고. 일상에 방해될 건 신경 안 쓰는데 나아. 그림 속 떡 노려봐야 뭐해."
"왜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냐, 응? 만약 우리가 소속사만 가지면 번드르르한 앨범에다가, 팬들이 막 쫓아오고."
"그것도 다 돈이고 빚이야. 게다가 자작곡 하나 없는 밴드가 어떻게 앨범을 내?"
"지금부터 하면 되지!"
"뭐? 작곡을 누가 해. 무슨 재주로."
"있지. 이제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다."
노구식이 진지한 얼굴로 양호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이용팔과 김대남이 서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진지하게 끄덕였다.
뭐하는 거야, 또.
"우리……. 음악 할 줄 안다."
"무슨 소리인데."
"너는 질색하고 일하느라 바빠서 못 끼워줬지만, 사실 너 빼고 우리는 다 같이 음악 학원 다녔다."
"그래서"
"그 세월이 벌써 3년이 넘었지,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우리도 할 수 있어!"
"아니, 노래부터 만들어 놓고 그런 말을 해."
"자, 빨리 들어봐!"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 속에서 MP3를 꺼내고, 헤드셋을 연결해서 건네주는 삼총사의 모습은 꼭 일은 다 벌여놓고 혼나기만 기다리는 강아지들 같았다. 아니, 시커먼 놈들 데리고 무슨 생각이람.
양호열은 불퉁스러운 얼굴로 헤드셋을 끼었다.
"이게 뭐야?"
"잘 들어봐. 보컬은 무시하고!"
용팔이가 대충 흥얼거리면서 아무 기사 나 읊조린 것 빼고 멜로디 자체는 괜찮았다.
"나쁘지는 않네."
"그치! 그럴 줄 알았어. 딱 기다려라.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숨지만 말고 일하고 있어 봐."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우리만 믿어, 이놈아!"
믿어서는 안되었다.
다시 말하는데.
양호열은 저 세 놈이 말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었다.
"백호 군단 보컬, 양호열 맞죠?"
그렇게 양호열은, 스시 집에서 열심히 밥알을 만지다가 덜컥, 연예인이 되었다. 스시집 사장은 이제 일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양호열을 웃으며 보내줬다. "유명해지면 자원봉사 하러 와~", "일도 아니고, 자원봉사를요?", "돈 많이 벌잖아. 우리 가게 와서 홍보 좀 해줘라.", "왜 성공할 거라 생각하는데요."
사장은 더 말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 뿐이었고, 양호열은 친구 놈들(이라 쓰고 원수라고 읽는다)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질질 끌려갔다.
모아둔 돈도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이제 밴드고 뭐고 저 놈의 보컬 강습도 지겨워죽겠고, 호열 씨는 가능성이 있어요! 라고 말하면서 좋아하던 가죽바지 압수한 채로 순하디. 순한 이미지로 밀고 나가자며 "대세는 순정! 순정입니다!"라면서 컨셉을 밀고 나가던 기획사에 이제 질릴 대로 질려버렸다.
오히려 원래의 팬들마저도 "이건 백호 군단이 아니야……."라며 앨범 수록곡들을 보면서 비실거리면서 유탈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소속사는 당황했다.
"아, 이상하네. 호열씨 얼굴은 되는 얼굴인데……."
중얼거리는 모습에 기가 찼다. 되기는 뭐가 돼.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역시.
그러다가 누군가 손을 들고 의견을 냈다.
"그, 백호 군단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름도 강렬한 편이기도 하고, 마냥 순정이랑은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아서요.“
"그럼 이제 와서 컨셉을 철수해? 이제까지 쌓아온 이미지는? 반응이 전혀 없지는 않잖아!"
"하지만 명백하게 하락세잖아요. 다가 이런 컨셉에 호열씨도 거부감이 심하시고요……."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기획실장과 인턴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호연이 이제 알았냐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그래, 호열 씨가 죽은 눈으로 하는데 청량이고 뭐가 이미지가 살 리가 없지……."
"팬들에게 설문조사 하는 건 어떨까요. 차라리 그 편이 나을 수도 있어요."
"단순 설문조사라고 하면 폼이 안 사는데……. 아, 그럼 팬들이 낸 컨셉으로 인기투표로 가자고. 1위인 의견은 이유 불문 무조건 해주는 거로. 그러면 꽤 참여율이 높겠지?"
"괜, 괜찮을까요? 호열씨 생각은 어때요?"
양호열은 그쯤 되어 이제는 정말 밴드고 뭐고 탈퇴해버릴까, 라는 생각까지 갔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백호 군단.
강백호가 농구에 빠지면서부터 정체성을 잃어버렸던 백호 군단. 졸업하고 나서는 정말 뿔뿔이 흩어질 뻔했던 백호 군단. 그들이 아직도 학생 때처럼 어울려 다닐 수 있던 건 주기적인 밴드 연습이 큰 몫이었다.
그리고 백호를 혼자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가슴께가 따끔거렸다. 맞아, 백호. 강백호. 양호열은 강백호에게 차인 이후로 쭉, 한 번도 그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 종종 구대용 삼총사가 실수로 언급할 때면 귀를 쫑긋했다. 아무래도 그들은 양호열을 빼고서 종종 강백호와 몇 번 만났듯 했고, 이미 몇 번이나 "너는 정말 안 볼 거냐. 앞으로 쭉?"이라며 강백호를 만나는 자리를 피해버리는 양호열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양호열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백호 군단을 나서면 이제 정말로, 강백호는 양호열의 인생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알아서 해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요. 이거 안 되면 저 탈퇴할 거예요."
양호열은 무리수를 질러버렸다. 갑작스러운 말에 기획실장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별수 없었다. 그들이 봐도 괜히 기획사에 들어오고서부터 꾸준히 하던 본업도 사라진 양호열, 그리고 자본주의 미소로 버티기는 하지만 몸에 맞지도 않은 순수하고 수줍어하는 사춘기 소년 컨셉으로 밀고 나가던 무비에서 양호열은 참을 만큼 참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짜 마지막이에요."
그렇게 벼르던 말을 곧이곧대로……. 팬 카페에 올려버리는 미쳐버린 인간이 어디 있나 했더니 멀지 않았다. 기획실장이 그래 버렸다. 다른 멤버들은 그 글을 보고서 양호열에게 따지러 왔다. 너 이대로 빠지냐. 아무도 못 빠진다. 이래버리는 것이다. 꽤 양아치 깡패 놈들처럼 겁박을 하면서 압력을 주는데, 양호열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을 밀어냈다. 계속 치대면서 "너 진짜 나가냐? 우리 보컬이랑 비주얼 그럼 누가 하냐."라면서 따지는 그들을 밀어내다가, 결국 주먹을 슬며시 들었다. 그러자 귀신같이 물러나서는 말로 하자고 한다.
"그렇게 주먹 들던 습관이 아직 남아서 어떡하나. 우리 공인인데."
"너희는 쭉 공인이겠지만 나는 곧 아니야."
"마지막 컨셉에서 바뀔 수도 있지. 낭만을 꿈꿔봐라, 야."
"낭만은 이 정도면 충분해."
양호열은 부르르 떨면서 끔찍했던 앨범 작업을 떠올렸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겠거니, 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자 양호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내내 양키로 보냈는데 소심한 찐다. 미소년을 컨셉으로 잡은 것에 현타가 많이 오기도 하였다. 가죽바지 입고 양키처럼 건들거리면서 무대를 하던 양호열을 이제 와서 "순수해요~ 소년이에요~" 이래봐야 누가 몰입하겠는가.
"야, 근데 팬 카페 흐름이 심상치 않은,"
김대남이 말을 자연스럽게 끊고는 이용팔의 갑작스러운 배치기 공격으로 다 같이 엎어져 버렸다.
"낭만은 영원하다. 말해봐."
"갑, 갑자기 왜 이래."
"낭만은 영원하다. 말해!"
"너 미쳤냐?"
"낭만은, 영원하다!!"
그날 이용팔은 대체 무엇에 꽂힌 건지 간만에 미친 용팔 모드가 되어서 세 명에게서 "낭만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공격을 멈추었다. 너무 황당하고 갑작스러워서 천하의 양호열도 어리둥절한 채로 그저 원하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닥을 뒹굴던 김대남인 눈치 채 버렸다.
그 팬 카페의 흐름을 양호열에게 숨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 이게 뭡니까?"
양호열은 흉악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팬 카페 투표 결과죠."
"왜 컨셉도 아니고 노래가 1위를 한 건데요?"
"……. 몰라요."
"왜 모르는데요."
"아니, 호열 씨는 그럼 카페 한번을 안 들어가 봤어요? 호열씨 탈퇴한다고 다들 난리가 나서 이제 양호열이 절대 안 할 컨셉을 굳이 시켜봐야만 한다는 사람들 달래주지도 않고 여론이 이렇게까지 흐를 동안에 손 놓고 방치한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죠? 바로 여기 있네요! 호열 씨가 벌인 일이에요!"
결국 참지 못하고 꽥 소리 질러버린 인턴이 벌벌 떨었다. 막상 그렇게 뱉었지만 양호열이란 사람은 무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기백이 무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습관처럼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 품새가 아무리 봐도 한두 번 해본 솜씨도 아닐 뿐에 정말로 잘못되면 사람 팰 것처럼 생겨서 왠지 쫄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늘 양호열은 회사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굴고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가끔 빡쳐 보였을 때의 그 아우라는 그가 아무래도 깡패 출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소문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양호열은 벌벌 떠는 인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영혼이 반절 나간 듯했다. 그리고 손에 들린 설문조사 결과지를 보았다. 투표 1위 : WIFE (여자아이들) 노래 부르기. 투표 2위 : 깜짝 발랄 마법 소녀 컨셉으로 코스프래 하고 일본노래 불러주기 투표 3위 : 야성미 넘치게 윗옷 찢어버리는 퍼포먼스. 투표 4위 : 삭발 이벤트 (특이점 : 반대표가 수집됨. 반대표 순위 2위를 차지함) 투표 5위 : 밴드 접어도 기획사 아이돌로 데뷔하기. (특이점 : 진짜 하면 팬싸를 가서 밴드로 돌아가라며 멱살드잡이질을 하겠다는 협박 글이 다수 발견되었음)
"왜……. 이딴 것들이……."
양호열은 별 생각 없었지만 대충 대중들이 "청량 컨셉 그만 해요"라던가 "이번 앨범 ~부분이 아쉬웠어요." 정도의 온화한 반응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기획실장의 의도된 실수로 보이는, 그 양호열의 은퇴 할지도, 안할지도? 의 애매한 공지가 사람들을 열 받게 한 듯했다.
"게다가 이 노래……."
양호열은 노래 이름을 노려보았다.
"아이돌 노래 아닙니까? 저희는 밴드인데 아이돌 노래를 어떻게 소화해요."
"왜 못해요. 할 수도 있지."
"노래 들어본 적 있는데 밴드로 음악은 아니었습니다. 어쿠스틱 버전으로 마음대로 편곡하기에는 저작권도 문제고요. 아니, 그리고 허락받았습니까? 다른 가수 노래를 부르는데, 게다가 남자 밴드가 여자 아이돌 노래를 부르는데 이걸 그냥 그대로 진행할 거예요?"
"사실 물어봤는데 재밌을 것 같다고……. 해보시라는데요.……."
"예?"
양호열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쭤봤죠. 이미……. 투표 끝나기 전부터 왠지 불안해서 미리 여쭤봤는데 괜찮다고……. 대신 편곡은 거의 손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왜요?"
"모르죠……."
양호열은 맹하게 눈을 깜빡깜빡 거리였다.
"구라까지 마세요."
"진짜인데요.……. 그리고 공식이 아니라, 그……. 이벤트성으로 작게 하는 거고……. 음원 업로드도 안 할 거고……. 영상도 안 올라갈 거라 괜찮을 거예요……."
"그래서, 진짜 한다고요? 이 컨셉을?"
"실장님은 3위까지 다 해보자는 데요."
"미쳤어요, 지금?"
양호열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회의실의 이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실장은 꽁무니를 빼고 컨셉 설명을 인턴에게 맡겨버린 터라 이를 박박 갈면서도 화를 낼 수 없었다. 양호열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약했단 말이다.
"오늘 일은 못 들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뭐든 하겠다면서요. 녹음도 됐어요. 내뺄 수 없으세요."
"정도가 있지 이런 장난 같은 일에…."
"그럼 밴드 계속하실 거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거 제대로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겠다. 하셨잖아요. 제대로 해보지도 않으실 거라면 그냥저냥 밴드 계속하시는 걸로 알게요."
"그게 아니잖아요. 하…."
양호열은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아파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다시 투표 결과를 째려보았다. 그래. 끝이니까. 마무리는 원래 힘겨우니까. 우스꽝스럽고 어이가 없어도 끝은 나니까.
"이게 정말 마지막입니다."
"이거 뜨면 계속하시는 거고요!"
"안 뜰 거예요."
"모르는 일이죠!"
"안 떠요."
양호열은 이를 박박 갈고는 결국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회의실을 떠났다.
그리고 수시로 팬 카페를 염탐하는 것이 뻔했단 김대남인 이 사실을 양호열에게 숨겼다는 죄목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복부와 허벅지를 여러 차례 구타당하였고, 양호열에게 잘못한 바가 있어 딱 3대까지는 맞아주고 그 뒤로는 개싸움이 벌어져서 양호열은 입가가 찢어지고 어깨와 쇄골 사이를 팔꿈치로 맞아서 병원에 입원할 뻔했지만 그래도 사이좋게 해결되었다. 그들은 함께 점보 라면을 먹고 화해하였다.
"맞아, 그리고 우리 무대 백호가 보러 올 수도 있다."
"뭐?"
"마지막 무대일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그날은 꼭 보러 오겠데. 실장님도 알고 계셔. 무대에 올라와서 사회를 맡을 수도 있다더라."
"걔가 뭘 안다고."
"너 몰랐냐? 강백호 완전 날아다녀.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자주 출현하고. 꽤 인기 많아. 농구 스타 다 됐다니까?"
"안 궁금해. 내 일도 아니고."
"야, 명색이 백호 군단 보컬이면서 언제까지 강백호랑 내외할 거냐? 너희도 좀 화해해!"
화해는 무슨. 헤어진 것도 모르고. 대충 서로 싸웠겠거니 하는 그들은 절대 양호열의 심정을 이해 못한다.
"백호가 보고 싶데. 너."
"……."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제 화 풀 때 안됐냐. 우리가 20대인 날들도 이제 얼마 없는데."
"아직 몇 년 남았어."
"백호 은퇴하고 나서도 안 만날 거냐?"
"걔가 왜 은퇴해."
"운동선수 은퇴 나이 어리잖아. 몇 년 안 남아올 거다. 백호도."
"……."
"은퇴하면 한국 오고 싶다고 했어. 그때도 네가 모른 척 하면 좀, 힘들 것 같다고 하더라."
괜히 심란해져서 벌떡 일어났다.
"야, 2차는?"
"안 가. 집이나 가."
"하여간, 야, 잘 생각해봐! 영원히 그렇게 살 수는 없잖냐!"
홀로 집까지 돌아가는 길. 괜히 길거리의 깡통을 찼다.
밴드를 시작하면서 줄이다가 이제는 피지 않은지 2년이 다 된 담배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양호열은 편의점에서 담배를 샀다. 알바생이 양호열을 보고 어……. 라며 뭔가 아는 척을 하려고 했지만, 담배만 계산해버리고 후다닥 나가버렸다. (그날 팬 카페에는 담배 피는 양호열 목격담이 올라왔다. 보컬을 하며 담배를 끊은 양호열을 알던 팬들은 그가 탈퇴한다는 말이 진심이었구나. 깨달아버렸다. 덕분에 평소보다 공연장이 꽉 찰 예정이었지만, 이때의 양호열은 그런 효과 같은 건 생각지 않고 그저 매캐한 속을 달랠 담배 한 갑이 절실했다.)
"옛날 생각나네."
양호열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간만에 들어오는 담배 연기는 메케하기는 구명 속을 뻥 뚫어주었다. 강백호. 강백호. 강백호. 그 놈의 강백호. 양호열은 피우던 담배를 입에서 빼고 한숨을 푹, 쉬었다.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거냐. 양호열, 바보 멍청아…."
바닥을 툭툭, 신코로 쳤다. 양호열과 강백호는 짧은 시간 만났다. 친구인 기간보다 훨씬 짧은 기간이었다. 그마저도 진심이 아니었다. 강백호는 양호열을 사랑한 적 없다. 양호열은 강백호와 사귀는 순간이 너무 좋아서 잊어버렸지만 강백호는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좋아한다. 결코 양호열이 될 수 없는 존재를, 갈망한다.
"장난은 그만 잊어버리고 다시 만나야 하긴 하는데."
그 시절을 없던 척 할 수 있을까? 양호열은 스스로 수십 번 물었고 그 대답은 항상 같았다. 미련을 버릴 수 없을 것 같아. 강백호가 이대로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까지 한다고 해도. 미련이 남아버릴 것 같아. 그도 그럴 게.
양호열은 강백호를 좋아했고. 그래서 짧게 사귀는 그 시간 동안 함께 손을 잡은 것도, 연습이라면서 속이고 입을 맞춘 것도. 더운 여름밤을 함께 보낸 것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으니까.
강백호는 미국에 가서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다. 강백호는 아기자기한 편지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상대방도 그 편지를 받으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래서 고백들은 전부 편지를 써서 했다. 양호열과 사귈 때는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았다. 양호열은 혹시, 미국에 가서 내 생각이 난다면 편지를 써달라고 하였고, 강백호는 한 통의 편지도 쓰지 않았다.
그게 몇 년이 되었을 때. 양호열은 그 기간 동안 아주 천천히 받아들였다. 강백호와 양호열은 사귀지 않는다. 사귄 것도 그저 호기심. 혹은 그 시간을 때울 누군가가 필요해서. 그러니까. 우리들은. 진짜가 아니었던 거지. 양호열은 어떨지 몰라도. 강백호에게는 그게 진심이 아니었던 거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계속 고개를 들며 눈치 없이 자라나는 마음을 짓밟아버렸다.
양호열은 아주 천천히 마음을 버렸고, 강백호가 미국에 있어서 아예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는 사실은 꽤 도움이 되었다.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관심을 받을 때는 강백호가 필요 없었다. 강백호보다 훨씬 좋았다.
"연습해야겠네."
그 모든 것이 기만이라는 건 이제 드러났다. 강백호가 무대를 보러 온다고 하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올라갈 때마다 늘 긴장이 되고 손발이 차게 식어갔던 무대. 완벽해야 한다고 중얼거리던 자신.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들. 그것을 떨쳐버리려는 듯 음악에 몰두하는 자신.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도 계속 음악을 신중하게 했다. 양호열은 우스운 꼴이 되는 걸 제일 싫어한다. 그렇기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최선을 다했다.
"이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양호열은 주저앉아서 담배를 마저 피웠다. 멍하니 턱을 괴고 어두운 골목길을 뚫어져라 보았다.
원래라면 골치 아픈 일이라면서 인상을 팍 쓰고 머리를 쥐어짜야 했는데. 바보같이 웃음이 실실 나왔다.
마지막 무대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양호열은 회사에 거의 매일 출근했다. 지하실에 있는 연습실에도. 데뷔 조 애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 그런 웃음기 섞인 소리도 들었다. 양호열은 원래도 노력파로 꽤 유명했지만 요즘은 또 다르다. 뭔가 즐거워 보인다. 마지막이라서 그런가. 컨셉이 낯설어서 그런가. 양호열이 꽤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자 팀 분위기도 점점 살아났다. 마지막이라고 한들 저렇게 즐기는 걸 보니 실감이 나지 않기도 하고, 저렇게까지 하는데 우리도 열심히 해보자, 하고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용팔은 투덜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드럼 박자를 넣을 타이밍을 분석하고 있었고, 노구씩은 노래를 잘 들어보면 베이스 타이밍이 보인다면서 묘비를 하루에도 10번은 본 것 같다. 김대남인 자신이 할 일은 없다면서 술이나 마시러 가려다가 양호열과 이 용팔에게 붙들려서 결국 자작곡들 점검과 일렉 솔로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어째서...? 아무도 나 같은 놈의 알렉 소리를 기대하지 않아, 이놈들아!", "우리가 기대해, 대남아.", "그냥 나만 노는 게 보기 싫은 거면서 거창한 소리 하기는..."
김대남의 말이 맞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연습실에 넣어뒀더니 또 투덜거리면서 할 건 다 한다. 웃기는 놈이라면서 밤새 연습을 하다가 아침에 쓰러져 자기를 반복했다. 나쁜 습관이라며 혼이 났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양호열은 무대 의상을 보았다. 검은색 점프슈트에다가 흰 티셔츠를 안에 입고서 하면 된다는데... 뭔가 심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에 쓰던 피어싱들을 꺼내어 귀에 꽂아 넣었다. 다행히 아직도 구멍이 남아 있었다. 왼쪽 귀에 3개, 오른쪽 귀에 5개를 넣었다. 기다란 뱀 모양의 은색 브로치도 점프슈트에 달았다. 검은 워커를 신고 머리를 뒤로 넘겼다. 목걸이를 할까 말까 고민되었다. 거울 속에는 이미 꽤 불량스러워 보이는 모양새가 있었다.
어느새 양호열은 웃고 있었다. 이제야 살아난 것 같았다.
"아주 신이 나셨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하더니?"
"그냥 마지막이니까 재밌게 하자 싶었던 거야."
"간만에 청량 컨셉 나오니까 신이 나셨네, 이럴 거면 왜 했냐? 고집 피워서라도 불량아 컨셉 가지."
"싫지는 않았다니까."
양호열은 게다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상의해서 결정한 걸 개인적 변덕으로 뒤집어엎을 생각 같은 것도 없다고 중얼거리다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 백호는?"
"강백호? 아, 걔 비행기 연착돼서 늦을 것 같다는데. 사회는 다른 사람이 보기로 했어."
"아, 그래...?"
양호열은 힘이 쭉 빠져버렸다. 괜히 힘쓴 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아졌다. 괜히 찝찝하고 머리가 신경 쓰였다. 무대 위에 올라가면 조명 탓에 열기가 상당한데, 이렇게까지 한 자신이 왠지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 초라한 기분이었다. 강백호는 미리 오지도 않아놓고. 그냥 되면 오고 아니면 말고 엮는데. 혼자 설레서 계속 연습하고 꾸미고, 나 뭐 하는 거냐.
스스로가 우스워서 맥 빠진 채로 헛웃음만 지었다.
"물이나 마셔둬. 전처럼 화장실 가고 싶다고 무대 급하게 마무리 하지 말고."
"그때 레전드 찍었잖아."
"화장실 가기 위한 열창을 사람들이 착각해줘서 망정이었지. 운에 기대지 말고 조금만 마셔."
"아, 알았다고."
한모금만 마셔두고 물통을 내려뒀다. 곧 무대 화장도 해야 하고.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주위에 기운이 쭉 빠진다.
자작곡이나 기타 솔로를 앞에 배치해두었다. 사람들이 죄다 양호열이 벌칙 아닌 벌칙을 하는 것을 보러 왔기 때문에, 일찍 나가는 사람들이 적도록 해당 무대는 뒤에 할 예정이었다.
양호열은 몇 번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탈퇴 금지야, 양호열!" 외치기도 했지만 맥 빠지게 웃으면서 손을 대충 흔들어줬을 뿐이었다.
"아아. 벌써 준비한 곡들이 떨어져 가서... 이제 진짜 그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양호열은 목을 가다듬고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 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사실 안 하고 싶기도 했는데, 그래도 여러분이랑 약속이니까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즐겨보자고요."
탈퇴하지마! 마지막 하지 막!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지만 양호열은 뒤로 물러나면서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노래가 시작되었다.
제자리에서 상체의 춤 동작만 따라 해봤다. 솔직히 양호열은 몸치다. 하지만 대충 스텝을 밟다가 역시 안되겠다면서 고개를 내젓고는, 마이크로 다가섰다. 대신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씩 웃더니, 생수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물이 뚝뚝,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셔버렸다. 사람들이 환호한다.
"자기야 크게 한입 맛봐."
노골적인 가사를 부르자 점점 환호성이 줄어든다. 대부분은 MR 처리했지만 그래도 몇몇 가사들은 직접 부르기로 하였다. 마이크를 느릿하게 쓸면서 고개를 숙이다가, 살짝 들어서 정면을 바라보자 수군거림이 들린다. 양호열은 다른 건 몰라도 무대 위에서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주목하는지는 알았다.
창백한 피부 위로 백색 조명이 쏟아져 내린다. 왠지 노래를 부르다 보니 더워지고 있었다. 점프슈트 위쪽을 벗어버리고 허리춤에 묶어버렸다. 물에 젖은 흰색 셔츠가 안을 다 비추고 있었다. 문신도 보이니까 자제하려고 했는데. 뭐 어쩌겠어.
다행히 노래는 짧았고 양호열은 금방 무대를 마칠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한동안 조용하다가,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생각보다 시시하죠? 기대하셨을 텐데 죄송해요."
"양호열이 춤을 못 춥니다. 억지로 시켜보려고 했는데 연습을 그렇게 하고도 못하더라고요."
웃으면서 이용팔이 하는 말에 슬쩍 뒤를 돌아서 욕을 해줬다.
"이 새끼 이제 이미지도 안 지키고 바로 욕 박아버리는 거 보세요. 여러분, 양호열이 이런 놈입니다."
"맞아요. 얼굴 보고 속지 마세요. 이 새끼 해동 중 일장이었어요."
"그 얘기를 지금 왜 해."
인상을 팍 쓰는 양호열과 멤버들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사람들은 꽤 좋아해 주었다. 그리고 예정되었던 대로 마지막이니만큼 팬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 노래는 이랬고 저 노래는 이랬고, 무슨 잡지사에서 인터뷰하는 것만큼이나 분량을 많이 잡아먹어 버렸다. 사람들은 고맙게도 지루하지도 않은지 눈을 빛내며 들어주었다.
"맞아, 이쯤 되어서 특별게스트가 도착했다는 소식인데요~"
"금방이라도 무대 위로 올라가고 싶어서 난리라네요. 백호 군단의 이름이 되어준 강백호 선수입니다!"
"빨리 나와라, 백호야!"
사람들이 웅성대다가 환호 소리를 내뱉었다. 양호열만 당황하여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 남들보다 한참 커서 혼자 우뚝 선 남자.
"... 강백호."
작게 중얼거린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강백호 눈썹을 까딱하더니 씩 웃어 보인다. 눈이 마주쳤다. 맹렬하고 강렬한.
양호열은 강백호의 저 눈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눈과 마주치기만 하면 마법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못 하게 된다.
"아아, 안녕하세요. 농구 선수 강백호입니다.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 얘가 왜 여기 있어? 싶으실 수도 있는데... 예, 제가 이놈들 친구라서요."
가까운 놈들부터 꿀밤을 딱딱 먹이면서 "나한테 상의도 없이 내 이름으로 밴드를 짓냐, 이 놈들아?"라며 다가왔다. 어느새 무대 정중앙에 온 강백호가, 양호열이 앉은 의자 바로 옆에 섰다.
"호연이 이 놈이 쪼잔해서 졸업하고 나서는 저랑 눈도 안 마주치더라고요. 간만에 만난 건데 여기 들어오자마자 들리는 게 네 와이프는 안될 거야. 이런 가사라서 놀랐네요. 나한테 하는 말인가? 하고요."
"하하, 저 놈들 부부 아니냐고 애들한테 놀림 많이 받았거든요. 거의 가족이었지, 뭐."
"맞아, 이제는 좀 화해해라!"
웃음을 터뜨리는 놈들에게 빠직빠직 분이 쌓였지만, 무대 위라서 처절한 응징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게 한이었다.
"근데 내가 노래를 마지막 부분만 들어서 그런데... 다시 불러주면 안 되냐?"
"안돼."
안될 게 뭐냐! 해줘라! 사람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지금 강백호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도 실감이 안 나는데, 여기서 그 노래를 다시 부르라고? 반주도 안 깔아준다 저 놈들. 구개용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구경이나 신나게 하자 싶은 모양이었다.
양호열은 혼자 노래를 시작했다.
I cook cream soup. tasty coco loco
want me your wife, but she is...
I clean your room, it's so twinkle, twinkle.
want me your wife, but she is...
자기야 크게 한 입 맛 봐, 배가 부르대도 뱉으면 나빠, 좀 더 줄 테니까 침 좀 닦아. 이제 다 큰 거 아니, 너네 아빠...
그 뒤 파트에서는 노랫소리가 줄어들었다. 이미 새빨갛게 익은 얼굴이 지금 상황이 범상치 않음을 보여준다
"뭐냐. 양호열 감전됨?"
"아까 쓸데없이 물 뿌리고 끼 부릴 때부터 알아봤다. 야, 야 정신 차려!"
강백호는 빤-휘. 양호열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왜, 좋은데. 더 불러줘, 호열아."
"... 저 이제 그만 부를래요."
"하하, 호열이가 부끄럼이 많아요. 아닌 척 해도. 맞아, 저희 고3 때 있던 일인데..."
마이크를 뺏더니 청산유수다. 양호열은 괜히 물을 마시려다가, 이미 아까 머리에 다 뿌린 것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축 젖어서 앞을 가리는 앞머리를 뒤로 넘겨 쓸었다가, 탈탈 털기도 하고.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어쩌지, 라고 했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그럼 끝이지. 이러는 거예요. 진짜 충격이었어요. 그 뒤로 진짜 오늘까지 저 얼굴 보지도 않았다니까요? 어떻게 그래요? 야, 너도 말해봐. 너 사랑은 했냐?"
"어어? 어. 어어... 했지. 우린 좋은 친구..."
"이것 봐, 저만 진심이었다니까요?"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사람들이 경악에 차면서도 저 희열에 찬 듯한 저 미묘한 반응. 그리고 그런 것이었냐면서 우리도 이제 알았다고 좌불안석해서 날뛰는 밴드 놈들. 땀이 저절로 나는 눈이 부신 조명. 양호열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다가, 강백호가 불쑥 내민 마이크에 "어?"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받아줄 거냐고. 청혼."
"어어?"
"근데 어째 내가 여기 딱 도착하자마자 그 노래를 부르냐. 진짜 저 놈들 중 한명이 먼저 일러바친 줄 알았잖아."
"어어?"
"다 들었을 거 아니야. 너 아직도 나 좋아하잖아. 다시 시작하자. 호열아. 그 말 하려고 여기 왔어."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양호열은 두 눈을 깜빡였다. 내가 꿈을 꾸는 걸까? 볼을 꼬집었지만 꿈이 아니었다.
"네가 말했잖아. 어차피 끝은 다른 사람일 텐데 기다려서 뭐하냐고. 그 뒤로 생각 많이 했어. 우리 둘의 끝이 서로라면. 그러면 네가 그때 쉽게 떠나지 않았을 텐데. 그때 당당하게 말할 걸. 그런 후회를 참 많이 했어. 아까 너는 노래로 싫다고 했지만 뭐. 그건 고백 듣기 전이고. 다시 말해줘."
강백호가 무릎을 꿇었다. 무대 위에서. 저게 미쳤나. 진짜. 양호열은 자신의 이 상황을 상기해본다. 밴드의 마지막 공연을 했다. 그 김에 강백호가 초청되었다. 그 김에 강백호가 고백을 한다. 지금. 사람들이 다 있는 앞에서. 이게 뭐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콘서트에서 고백하는 건 최악이라고 들었어, 백호야..."
"이렇게라도 안 하면 또 어영부영 답 피할 거잖아. 난 더 이상 못 참아."
강백호는 당황하여 무대에서 내려가려는 양호열을 꽉 잡았다.
"좋아해. 같이 살자."
강백호가 내미는 반지가, 무대 조명을 받아 더욱 반짝거렸다.
"백호야... 넌 무슨 이런 때에 고백을 해..."
"청혼이야."
진지한 강백호를 보면서 현기증이 났다. 강백호를 좋아해. 잊기 힘들었어. 하지만? 3년이나 만나지 않았던 옛 연인이 콘서트장 위에서 이렇게 하는 건 너무 혼란스러운 일이었고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냉정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고. 분명히 평소의 차분한 양호열이었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텐데...
받아줘, 받아줘, 받아줘!
무슨 초등학생 교실에서 누군가 고백했을 때 우르르 받아주라면서 둥글게 원을 모아 열창을 하는 꼬꼬마들처럼 받아주라며 환호성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서 양호열은 아무래도 정신이 조금 나갔던 모양이었다.
"일, 일단 줘봐..."
"절대 빼지 마."
강백호는 양호열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활짝 웃었다. 희게 드러나는 이, 웃을 때마다 살짝 찌푸려지는 이마를 보면서. 양호열은 자신의 심장이 쿵, 쿵 뛰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달아올랐다. 왠지 고개를 들 수 없어서 두 손에 고개를 파묻었다.

